표현주의 미술은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시각언어였다

2025-08-28 14:49:57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모더니즘의 폭발, 내면을 통한 존재의 해방 (16)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로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 미술에 이어 모더니즘 미술의 서곡(Overture)인 인상주의, 서막(Prologue)인 후기 인상주의, 본 막(Main Act)인 야수파, 입체파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사회는 산업혁명의 심화, 과학기술의 발달, 제국주의의 확대 등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미술은 ‘시대의 실험’이 되었다. 이로써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고 ‘모더니즘 미술’이 새롭게 등장한다.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반 들어 ‘색채와 형태’를 해방한 프랑스의 야수파, 입체파미술과 함께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등장으로 모더니즘 미술은 본격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표현주의는 20세기 초반에 독일을 중심으로 등장한 미술사조다.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고흐, 고갱 등의 후기 인상주의와 야수파로부터 자극을 받았으나 독일의 정신성과 사유가 빗어낸 고유한 미술이다. 한마디로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또 다른 축이었다. 그렇다면 표현과 표현주의, 이를 최초로 구현한 프랑스의 인상주의(Impressionism)와 독일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무엇이 다른가? 두 미술은 모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재현(representation)에서 내면의 정신과 감정을 통해 대상을 변형시키는 표현(expression)으로 넘어간 미술이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보이는 것을 느끼는 대로’ 그린 미술이었다면, 표현주의는 ‘느끼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린 미술이었다.

이처럼 독일의 표현주의는 내면의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시각언어였다. 또한 내면의 심연을 드러내기 위해 대상의 형태와 색을 변형, 왜곡하였기에 ‘존재를 해방’한 미술이었다. 표현주의 미술은 19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등장한 ‘다리 파’와 1911년 뮌헨에서 등장한 ‘청기사파’로부터 시작되어 베를린, 비엔나 등으로 확산하였다. 그러나 표현주의는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의 정신적 위기와 맞물리면서 회화뿐만 아니라, 문학, 연극, 영화 등 전반적인 문화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독일의 표현주의는 ‘색채와 형태’를 해방한 프랑스의 야수파, 입체파와 함께 모더니즘 미술을 동시다발적으로 폭발시켰다.

독일의 다리 파와 청기사파는 불안한 시대 상황을 표현주의로 분출

그렇다면 독일 표현주의의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우선 ‘다리 파’는 1905년 드레스덴 공과대학 학생인 키르히너, 헤켈, 놀데 등이 새로운 예술을 향한 다리가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출범한 미술이다. 1911년에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활동하였으나, 내부갈등으로 1913년에 해체되었다. 그들은 산업화, 도시화 속 인간의 불안, 고독, 퇴폐, 소외를 모티브로 현실 비판적인 그림을 그렸다. 한편 ‘청기사(푸른 기수)파’는 1911년 뮌헨에서 칸딘스키, 마르크 등이 푸른색 말(영적)+기사(이상)라는 상징을 표현하기 위해 출범한 미술이다. 이들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종말을 맞았지만, 주로 음악, 동물 등을 제재로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두 미술은 형태와 색채의 변형과 왜곡 등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전의 불안한 시대 상황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다.

사실 독일 표현주의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는 시대적 상황이다. 20세기 초 독일제국은 1871년 통일 이후 산업화, 군사화, 제국주의 팽창으로 사회갈등과 불안이 깊어졌다. 이에 젊은 예술가들은 권위적인 제도(아카데미, 국가, 군국주의)에 저항감을 느끼면서 표현주의로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둘째는 철학적 배경이다. 정신, 초월, 직관, 무의식을 강조한 칸트, 헤겔, 니체, 베르그송, 프로이트 철학은 낭만주의 이후 독일 예술가들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예술의 자율성’을 제기한 칸트와 예술을 ‘정신의 자기표현’으로 본 헤겔의 관념론은 표현주의 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셋째는 국제적 교류다. 접경국인 프랑스와의 전시 및 화가 간 교류,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파리에서 유학하고 드레스덴, 베를린 등지에서 전시를 가졌던 노르웨이 화가인 뭉크가 큰 영향을 미쳤다.

표현주의는 ‘독일에서 죽고, 국제적으로 살아난’ 예술의 역설

필자는 지난해 7월 23일부터 27간 독일 드레스덴의 올드 마스터스 픽쳐 갤러리, 베를린의 신 국립미술관, 알테 뮤지엄 미술관 등을, 뮌헨의 노이에(신), 알테(구) 회화관 등을 방문하면서 표현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독일에는 다리 파, 청기사파의 표현주의 미술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들의 활동 기간이 짧았고, 나치 시대에는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작품들이 미국, 프랑스, 스위스 시장 등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1937년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표현주의, 다다이즘, 추상, 초현실주의 미술을 약 2만 점 이상 몰수하여 그중 650점을 선별해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을 개최하고 국민의 조롱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작품의 유출로 표현주의는 해외에서 재평가되었고, 전후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야말로 표현주의는 ‘독일에서 죽고, 국제적으로 살아나는’ 예술의 역설이었다.

여기서 잠깐 프랑스와 독일미술을 비교해 본다. 서양미술은 이탈리아 중심의 르네상스 미술 이후 근대미술은 사실상 프랑스가 중심이었고, 20세기 들어서는 후기 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 등의 프랑스계열 미술과 후기 인상주의-표현주의-바우하우스-추상미술 등의 독일계열 미술이 주축이었다. 이는 MoMA(뉴욕현대미술관)의 초대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가 1936년에 제시한 흐름인데 이론의 여지는 있다. 그는 표현주의를 프랑스의 색채해방과 연결하면서도 독일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아무튼 독일의 표현주의는 프랑스에서 색채의 ‘불씨’를 가져와 정신과 감정의 해방이라는 ‘불꽃’을 터트린 것이다. 그렇다. 프랑스가 ‘눈’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본 것이라면, 독일은 ‘마음’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본 것이다. 한마디로 ‘밖에서 안으로’와 ‘안에서 밖으로’의 차이다. 이러한 차이는 두 나라 민족의 뿌리(라틴족, 게르만족)가 다르고, 정신적, 문화적, 철학적 배경이 다른 데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키르히너의 ‘포츠담 광장’은 대표적인 독일 표현주의의 명작

이제 표현주의 대가들의 작품을 살펴본다. 표현주의 화가는 독일의 키르히너, 헤켈, 칸딘스키, 마르크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다리 파에 영향을 준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 청기사파로 활동한 스위스 출신의 파울 클레 등이 있다. 그러나 클레는 표현주의뿐만 아니라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화가로도 분류되기에 그때 가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다리 파’의 리더는 에른스트 키르히너(1880~1938)다. 그는 바이에른주 아슈아펜브르크 제지공장의 화학 기술자 아들로 태어나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진로를 바꿔 1905년에 동료들과 다리 파를 결성했다. 초기에는 누드화, 초상화 등을 그렸으나,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한 후에는 도시풍경, 매춘부, 군중을 주제로 한 ‘거리 화’ 시리즈 등을 제작했다.

포츠담 광장
포츠담 광장(그림1)

‘거리 화’는 드레스덴, 베를린의 거리 풍경을 그린 것으로 작품들은 드레스덴, 베를린, 미국 등의 여러 미술관에 분산되어있다. 그 가운데 베를린의 신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포츠담 광장 (Potsdamer Platz, 200x 150cm, 1914)’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1).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이 아니라 베를린 내의 한 광장이다. 거리의 매춘부와 도시인의 긴장을 그린 것으로 제1차 대전 발발 직전의 불안한 도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화면 중앙에는 붉은 옷차림의 매춘부 2명이 도도하게 서 있고 배경으로 자동차, 전차, 남성들이 혼란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바닥은 비현실적인 초록색으로 칠해져 불안감을 강조하고, 인물들의 얼굴은 각지고 기괴하다. 표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포츠담 광장을 단순히 거리 풍경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현대도시의 불안, 소외, 성적 긴장감을 압축적으로 상징한 무대로 표현한 것이다. 1913년 다리 파는 내부갈등으로 해체되었고, 키르히너는 전쟁의 발발로 징집되었으나, 신경쇠약으로 퇴역 후 스위스 다보스에서 화가의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1937년 ‘퇴폐미술전’ 개최 당시 수백 점의 작품이 몰수되어 그중 많은 작품이 파괴되자 절망 끝에 그 이듬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후에 독일 표현주의 걸작으로 재평가되었다.

칸딘스키의 ‘구성 7’은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것’을 탐구한 명작

다음은 뮌헨에서 청기사파를 주도한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다. 그는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를 이끈 주요한 화가이며, 표현주의 이후에도 추상미술, 조형주의의 선구자로 순수 추상화의 문을 연 대가였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 가정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음악(피아노, 첼로, 바이올린)과 미술교육을 함께 받으며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배경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모스크바대학 시절에는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교수직 제안까지 받았던 인재였다. 그러나 1985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고흐의 ‘건초더미’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바그너의 음악 ‘로엔그린’에서 회화가 음악처럼 영혼을 울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듬해인 1896년 칸딘스키(30세)는 당시에는 파리 다음의 제2의 예술 도시였던 뮌헨으로 이주하여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뮌헨은 동유럽 예술가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가는 도시였기에 칸딘스키도 그곳으로 간 것이다. 그가 주도한 청기사파는 아카데미 미술에 반발해서 설립(1892)된 ‘뮌헨 분리파’가 칸딘스키, 마르크 등의 작품을 거부하면서 탄생한 그룹이다. 그렇기에 뮌헨 분리파보다 더 급진적인 그룹이었다. 그러나 청기사파는 칸딘스키가 세계대전의 발발로 러시아로 귀국하면서 3년 만에 종말을 맞게 되었다.

구성 7
구성 7(그림 2)

청기사파 시절 칸딘스키의 대표작은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성 7(Composition 7, 200 x 302, 1913,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이다(그림 2). 그림 전체는 소용돌이치는 곡선과 색 면, 겹겹의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종말, 심판, 부활, 낙원 같은 종교적이며, 영적인 모티브를 배경으로 추상적으로 그린 것이다. 구성과 형태는 무너뜨리고, 선과 색의 리듬을 강조한 표현주의 특징이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을 불과 3일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수많은 습작과 치밀한 계획하에 폭발하듯 그렸을 것이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대가인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도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것’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계보를 잇는다. 이렇게 칸딘스키는 비전공자로 출발했지만, 독학과 실험을 통해 추상회화를 개척한 화가였다. 그러나 그는 청기사파를 결성하기 전에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11)’라는 책을 저술하고, “회화는 재현을 넘어 순수한 정신적 울림을 전해야 한다”라는 이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칸딘스키는 비전공자이었기에 오히려 기존의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각언어를 창조한 ‘인생 역전’의 화가였다.

뭉크의 ‘절규’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시각화한 걸작

다음은 상징주의 화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표현주의와의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한 에드바르 뭉크(1863~944)다. 그는 노르웨이 출신이지만 1890년대 드레스덴, 베를린에서 전시 활동을 하면서 다리 파 등 독일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기도 했지만, 그가 겪은 불안, 사랑, 죽음, 외로움 등이 독일 표현주의의 핵심 주제와 직결됨으로써 ‘표현주의의 선구자’,또는 ‘영혼의 화가’로 불린다. 노르웨이의 로이텐 근처 작은마을에서 태어난 뭉크의 어린 시절은 암울했다. 다섯 살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잃고, 14세 때는 누나도 같은 병으로 잃었으며, 빈민가 의사이면서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아버지로부터 각인된 것은 죄의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트라우마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던 뭉크는 18세 때 오슬로 왕립미술학교에 진학하면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889년 졸업 후에는 장학금으로 파리 유학 (에콜데 보자르)을 갔으나, 아카데미 미술에는 관심이 없어 파리 살롱이나, 전시 등을 다니면서 고흐, 고갱, 로트랙 등의 미술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랑, 질투, 불안, 병, 죽음 등을 주제로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병든 아이(1886)’, ‘절규(1893)’, ‘불안(1894)’,‘키스(1897)’ 등의 작품은 1905년 독일의 다리 파, 1911년의 청기사파가 창립하기 전의 그림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영혼의 일기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인생 자체는 표현주의의 내용이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고통을 예술로 승화한 자서전적 서사였다.

절규
절규(그림 3)

절규(1893)’는 오슬로의 뭉크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3). 두 번(1994, 2004)씩이나 도난을 당해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림이 너무 강렬해서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명작이다. 화면의 인물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형태와 색을 왜곡하여 ‘정신과 감정’을 시각화했기 때문이다. 인물이 두 손으로 창백한 얼굴을 감싸 쥔 것은 공포와 죽음의 불안을, 뒤에 떨어져 따라오는 친구 두 명은 단절을 의미한다.

붉은 하늘은 불안, 공포, 피와 죽음을 상징하고, 하늘, 피요르드, 산, 다리를 연결한 파도 같은 곡선은 내면의 동요를 나타낸다. 이 그림이 걸작인 것은 뭉크가 개인적 고통을 보편적인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오슬로 피요르드(Oslofjord) 항구의 문화·위락지구에 있는 뭉크미술관은 뭉크가 죽기 직전에 1,000점 이상의 회화 등을 오슬로시에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건립한 전용 미술관이다. 뭉크미술관은 피요르드와 함께 노르웨이 관광의 상징이었다. 뭉크의 얼굴이 그려진 1,000크로네 지폐는 그가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독일 표현주의는 ‘정신적 세계의 시각화’ 흐름을 주도한 미술

이렇게 표현주의 미술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형태와 색채’를 왜곡한 시각언어였다. 즉, 재현을 넘어 표현을 극대화한 미술이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인간의 실존적 불안, 소외, 고통 등을 다리 파와 청기사파가 독일적 정신성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여기서 독일의 표현주의는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인간의 내면과 심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조형 언어로 번역한 미술이었다. 둘째, 프랑스 미술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원리를 만든 미술이었다. 즉, 프랑스 미술의 흐름이 ‘시각적 세계의 해석’이라면, 독일 표현주의는 ‘정신적 세계의 시각화’ 흐름을 이끈 것이었다. 셋째, 프랑스의 야수파, 입체파와 동시대 독일의 표현주의는 색, 형태, 정신과 감정을 해방함으로써 고전미술의 문법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모더니즘을 본격적으로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유럽 미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아방가르드 예술의 흐름은 끊기게 되고, 전쟁의 참혹함과 부조리에 대한 반발로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전후 미술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영국,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새로운 미술을 지향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 신예술) 와 분리파(Secession) 미술 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