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공직생활 통해 발견한 ‘호의’의 힘

2025-08-29 13:00:01 게재

문형배 재판관 첫 에세이 ‘호의에 대하여’ 출간 … 평균인의 삶 살려 애쓴 판사의 성찰 담아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과 함께 우리 기억에 남은 것이 있다. 선고 요지를 읽어 내려가던 한 재판관의 차분한 표정과 단호한 목소리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았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첫번째 저서 ‘호의에 대하여’(김영사)를 출간했다.

선고가 늦어지는 것보다 선고하지 않고 임기를 마칠까 봐 두려웠다고 했던 문 전 재판관. 부산 경남 지역에서 대부분의 공직생활을 보내며 1998년부터 작성한 1500여편의 글 중 120편을 선별해 담은 이 에세이집에서 그가 걸어온 길과 지향하는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책은 일상을 대하는 태도(1부), 책에 대한 감상(2부), 법원과 사회에 바라는 점(3부)으로 구성됐다. 문 전 재판관은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이라고 이 책을 소개했다.

양형 기준을 강화해 공직 부패와 비리에 대해 엄정하게 판결하면서도 사회적 약자에겐 상담과 치료 프로그램을 이행한 후 그 결과를 양형에 반영해온 문 전 재판관. 무엇이 그를 이런 길로 이끌었을까, 그는 무엇을 향해 나아갔을까. 그 답은 30년 가까이 부단히 공부하고 성찰한 시간 속에서 발견한 ‘호의’라는 단어에 있다.

울산교육청서 특강하는 문형배 전 권한대행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6월 25일 울산시교육청 대강당에서 교직원 헌법 특강을 하고 있다. 울산=연합뉴스 김용태 기자

◆‘자살’을 ‘살자’로 바꾼 호의의 대화 = 책에는 문 전 재판관이 재판 과정에서 경험한 다양한 사례들이 담겨 있다. 특히 자살을 하려고 여관에 불을 지른 사건에서의 선고 장면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자살자살자살자살.... 이렇게 열번 하면 본인은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살자’로 들립니다”라며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번 외치게 했다. 이어 “당신이 떠나고 나면 당신을 붙잡지 못한 미안함에 며칠을 울어야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조정 절차에서도 호의의 힘을 발휘했다. 타협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건에서 이해당사자들에게 건넨 녹차 한잔과 낡은 우산 하나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화가 나면 화를 이기기 힘들므로 화가 나기 전에 화를 늦추라”는 조언도 자주 했다고 밝혔다.

문 전 재판관은 대학 입학 후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초임 판사 시절 사건과 사람을 이해하기에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간접경험을 넓히는 방편으로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판사란 타인의 인생에, 특히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이라며 “분쟁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인생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없다면 그들 인생에 커다란 짐을 지우는 오판을 할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40년간의 독서로 생각의 방향을 정리하고 각 사안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소신을 갖출 수 있었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부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독서 이력을 자랑한다.

호의에 대하여 / 문형배 / 김영사 / 1만8000원

◆화이트칼라 범죄엔 엄정, 사회적 약자엔 배려 = 문 전 재판관은 공직 부패와 비리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판결해왔다. 창원지법이 공직 부패와 비리의 양형 기준을 강화할 때 참여했고 재판 과정에 그 기준을 반영했다. 전관예우 논란 해소를 위해 양형 기준제 전면 확대를 건의하기도 했다.

반면 사회적 약자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처한 어려운 환경을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뒀다. 폭력 사건 피고인에게 상담 및 치료 프로그램을 이행하게 하여 그 결과를 양형에 반영했다.

사형제 폐지에 대한 의견도 분명히 했다. “생명의 경중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자신은 형사 재판 중 한번도 사형 선고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문 전 재판관은 “누군가의 작은 호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며 “우리부터 먼저 호의를 베풀자”고 제안했다. “주위에 불행한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복역 중인 기결수에게 받은 편지에는 “판사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편지가 그를 법원에서 “영원히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했다.

◆호의로 시작되는 선순환의 꿈 = “선생님은 저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갚을 것입니다. 이런 선순환이 쌓여 이 사회가 훨씬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지길 바랍니다”라는 글처럼, 문 전 재판관이 꿈꾸는 사회는 호의의 선순환이 만들어가는 따뜻한 공동체다.

문 전 재판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가 김장하 선생이다. 책에는 받은 것을 사회에 되돌려주라던 김장하 선생과의 추억이 담겨 있다. 문 전 재판관은 김장하 장학생으로서 선생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왔다. 6월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김장하 선생 관련 책 ‘줬으면 그만이지’ 북토크에 ‘김장하 장학생’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은 다수결이 아닌 관용과 자제”라고 강조하며 사회 통합을 위한 국회의 역할을 주문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거창한 구호는 없습니다”라며 “했던 말을 실천에 옮기고, 남을 비판할 때 썼던 그 잣대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문 전 재판관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제18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부산지방법원 창원지방법원 부산고등법원 부장판사, 부산가정법원장 등을 역임하며 부산 경남 지역에서 공직 생활 대부분을 보냈다. 2018년 4월 19일 헌법재판관 임기를 시작해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았으며, 2025년 4월 18일 퇴임했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송현경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