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산업안전 선진화는 민주행정이 전제
산업재해를 주제로 생중계된 7월 29일 국무회의로 이재명 대통령은 확고한 사망재해 근절 의지를 알렸다. 계엄사태 종식처럼 당연한 일이지만 반가웠다. 그러나 각 부처 제안의 행간에 보인 사고와 예방에 대한 이해는 몹시 걱정스럽다.
산재예방이 기업 자율로 이뤄지는 나라는 없다. 유럽연합(EU)를 포함해 안전선진국 대부분은 규제와 감독을 전제로 기업 자율과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안전의 역사가 짧은 우리는 정부 규제가 절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후진적인 산업안전의 배경
다행히 국무회의 중에 다단계 하도급과 같은 사회구조 문제, 장시간·야간 근로와 같은 인지공학적 관점, 처벌은 주주의 불이익으로 즉, 위험은 만든 자의 책임이라는 영국의 로벤스보고서, 지켜지지 않는 법규 폐기라는 WAI(예상 작업)/WAD(실제 작업) 관점 등 담당 실무진의 사고를 넘어선 주옥같은 생각들이 돋보였다. 그중 으뜸은 정부 행정은 공무원 편의가 아닌 행정 대상 입장에서라는 민주행정에 대한 각성이다.
회의 과정에 ‘후진적인’이라는 수사가 언급됐다. 사망재해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상회하는 상황과 기업의 안전조치가 후진적이라는 평가는 타당하다. 그러나 후진성의 배경은 전체 산업안전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부의 정책과 규제에 있다. 선진화는 정부 정책과 규제의 재설정에서 그것도 민주행정으로 시작해야 가능하다.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제정은 사회적 요구가 아닌 1979년 10.26 사태 후 신군부 집권을 위한 포석이었다. 고 전태일 열사, YH무역 여성 근로자 신민당사 점거 사건 등 확산되는 노동운동 무마를 위해 일본의 법규를 본떠 급속 제정됐다. 물론 제정 배경과는 별개로 담당 공무원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산재 감소를 위해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왔다.
원진레이온 사태와 태안화력 사고를 계기로 두차례 전면 개정도 있었다. 그러나 제·개정 시 숙의 부족과 고전적 정책과 규제는 산업과 생산 환경의 큰 변화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 울타리에 쌓여 산업안전 선진화의 굳건한 장벽이 되고 있다.
산업안전의 발전은 사고 관점이 변수
사고 관점과 예방의 혁신적 변화는 1931년 보험통계에 기반을 둔 1:29:300 사고 비율, 사고 도미노의 창시자 하인리히의 이론에서 시작됐고 사고가 운명적이라는 미신에서 벗어나게 했다. 하인리히는 사고의 직접 원인을 설비의 결함과 작업자의 실수에서, 예방은 그 직접 원인을 찾아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뛰어난 통찰이었고 사고가 빈번했던 당시의 재해 감소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1979년 미국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TMI)는 안전연구자들에게 인간의 실수(Human Error)를 주목하게 했고 많은 연구를 통해 얻은, 인간의 실수는 작업 조건과 환경의 결과라는 통찰은 많은 해결방법을 끌어 냈다. 그 뒤 1986년 챌린저호, 체르노빌 원전붕괴 사고조사와 연구결과, 사고는 인간의 실수보다 사회-기술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조직과 기술 조합에서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방법이 제시됐다.
같은 시기 TMI 사고를 중심으로 장기간에 걸쳐 많은 사고와 분석자료를 연구한 사회학자 찰스 페로우(Charles Perrow)는 정상사고라는 과감한 제목으로 사고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 관점은 선진국 안전연구자들을 시스템으로 이끌어 시스템 내 각 부분들의 상호작용 개선을 통해 사고 전 위험을 억지하는 방법론을 내놓고 있다.
안전론의 발전은 기술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급속히 감소되는 사고율을 더 낮추려는 노력의 결과다. 또 연구 계기는 대형 사고들이었지만 자각되지 않는 인지 편향 때문에 단순해 보이는 사고들도 그 발생 기제는 규모의 차이 외에는 대형 사고들과 거의 같다.
사업장 감독 강화, 최근 중대재해가 몰려 발생한 대형 건설사에 대한 강한 질타와 압박 등 처벌 중심의 방침은 ‘기본적이고 간단한 안전조치로 막을 수 있는 사고’라는 하인리히의 고전적 관점에서 비롯됐다. 우리 사회의 보편적 관점이기는 하나, 관료주의 행정을 당연시하게 될 관점이다.
현재의 사망재해율을 더 낮추려면 사고를 보는 관점부터 달라져야 한다. 법 개정은 위의 이해와 사회적 숙의가 필요하니 뒤로 하더라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화근이 아닌 중대재해 감소 동력이 되려면 정부의 정책과 규제는 지금 당장 민주행정, 행정 대상 맞춤형으로 재설정돼야 한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