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양자 아폴로계획’

2025-09-03 13:00:03 게재

중대한 과학적 발견의 출발점은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은 과학자 개개인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해서 무엇이 나중에 더 큰 열매를 맺을지 속단할 수 없다. 일단 골고루 물을 주고 어디서 싹이 틀지 지켜봐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잠시 사라졌던 풀뿌리 기초연구 지원이 이번 정부에서 부활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때로는 국가 구성원 전체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집단적 형태의 과학연구와 기술개발도 필요하다.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변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런 추세는 더 늘어날 것이다.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는 두 세기 전인 1820년 무렵 차분기관이란 걸 만들려고 했다. 그 당시 천문학자 공학자 항해술사들은 로그함수 값, 삼각함수 값을 계산한 표를 지참해야 했는데 사람 손으로 계산한 숫자에는 오류가 많았다.

배비지는 영국정부로부터 무려 군함 두 척을 살 수 있는 비용을 지원받아 그 계산을 오류없이 빠르게 해낼 기계 개발에 몰두했다. 비록 배비지의 차분기관은 작동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가 뿌렸던 씨앗은 전기 문명 시대를 맞아 전기로 작동하는 컴퓨터 개발의 지침서가 됐다.

에니악이란 세계 최초의 범용 컴퓨터는 2차세계대전 당시 포탄의 궤도를 정확히 계산하기 위한 도구로 개발된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의 온도 습도 바람세기와 방향에 따라 바뀌는 포탄의 궤도를 예측하려면 비선형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했지만 이걸 사람 손으로 풀기란 불가능했다.

차분기관이나 에니악 제작은 시대의 요구였다. 그 요구를 감지한 것은 당대의 과학자 공학자들이지만 개발을 지원한 것은 국가였다. 2차대전 당시 원자탄 개발을 위해 설립된 미국의 맨해튼계획도 마찬가지다. 원자력의 가공할 힘을 알린 것은 과학자였고 개발을 결단한 것은 정치인과 군인이었다.

양자컴 만들기 위한 예산 노력 인력 필요

인공지능을 장착한 고성능 컴퓨터가 지배하는 요즘도 안 풀리는 계산 문제가 있다. 양자역학의 근본원리를 동원해 생명현상을 이해하거나, 아주 많은 경우의 수를 다 따져서 최적의 답을 찾아내는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를 풀 유일한 대안은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양자컴퓨터를 만들려면 막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양자 컴퓨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더 뛰어난 성능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에도 자체 기술로 제작한 양자컴퓨터가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표준연)의 이용호 박사와 10명 남짓한 연구원들이 성균관대, 울산과학기술원,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등 외부 연구진의 조력을 받아 3년여 노력 끝에 20큐빗짜리 초전도체 양자컴퓨터를 만들어냈다. 이 과제를 지휘한 이용호 박사는 모든 기계를 자유자재로 만들고 부릴 줄 아는 ‘진짜 과학자’다.

아직 미약한 면이 없지 않으나 여전히 국산 양자컴퓨터란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방법에는 초전도체, 원자, 빛을 이용한 여러가지 방식이 있지만 국내에는 이번 표준연이 제작한 20큐빗 초전도체 방식의 양자 컴퓨터가 유일하다.

과학계 일부에서는 한쪽으로 치우친 투자를 염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군비경쟁에 가까운 양자경쟁이 진행 중이란 현실을 무시한 비판이다. 양자컴퓨터의 선두업체인 구글이 자체 제작한 양자컴퓨터를 이용해 새로운 계산 결과를 얻으면 학술지에 발표한다. 논문 한편에 참여하는 박사급 인원이 200명쯤 된다. 표준연의 양자컴퓨터 개발에투입된 인력은 그 1/10이다.

원자 방식 양자컴퓨터 제작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는 업체 아이온큐의 연간 연구비는 1000억원 정도다. 반면 표준연의 양자 컴퓨터 개발에 투입된 기간은 3년, 총예산은 300여억원에 불과하다. 다행히 내년부터 시작되는 100큐빗 초전도체 양자컴퓨터 구축 사업에는 5년 간 총 1000억원 단위의 연구비가 투입될 것이라고 한다.

예산보다 중요한 요소는 노력과 인력의 집중이다. 인류가 단 한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기계를 만들려면 소자 개발, 회로 개발, 제어 및 계측기기 개발과 함께 관련 이론 개발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수학자, 소자를 제작하는 물리학자, 마이크로파 발생기를 잘 다루는 전기공학자, 제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컴퓨터공학자가 소통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양자연구소를 만들고 인재를 모으는 것이다. 마침 표준연과 인근 카이스트가 합작해서 만든 양자대학원이란 게 있다. 여기 입학한 젊은 인재들은 표준연에서 양자컴퓨터 제작에 참여하면서 연구와 개발을 병행할 수 있다. 이런 인재들이 미래 걱정 없이 양자컴퓨터 개발에 청춘을 바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줘야 한다.

표준연을 국가양자기술 중심지로 세우자

대규모 연구비를 초전도체 양자컴퓨터 한대 만드는 데 다 쏟지 말고 다양한 양자 기술 분야에 골고루 나눠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평화로운 시대에 먼 훗날을 위한 과학투자라면 이런 주장이 합당하다. 하지만 지금은 양자전쟁시대고 우리에게는 양자 아폴로계획이 필요하다.

중력법칙과 로켓추진원리가 다 알려진 상태에서 아폴로계획이 시작되었다. 기본원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로켓을 누구나 만들지는 못한다. 달까지 갈 우주선을 만들기 위해 나사라는 거대 기관이 만들어졌고 인재가 모였다.

일본은 이화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중국은 몇몇 일류 대학 부설 연구소를 구심점으로 양자컴퓨터를 자체 제작해 운영하는 중이다. 이미 선점 효과를 누리고 있는 표준연을 국가양자기술의 중심지로 격상시키고 인재와 지원을 모아줘야 할 때다.

한정훈 성균관대학교 교수, 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