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대규모 한인 체포, 불안해 투자하겠나
미국 이민당국이 조지아주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공장 건설현장을 급습해 한국인 노동자 300여명을 체포·구금했다. 불법이민을 단속한다며 동맹국의 글로벌기업을 대상으로 헬기와 장갑차를 동원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것도 충격적이지만, 체포과정에서 중범죄자 다루듯 손발을 쇠사슬로 묶고 연행하는 장면을 보란 듯 공개한 인권침해에 분노하는 국민이 많다.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한미정상회담 불과 열흘 만에 벌어진 일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다.
체포된 한국인들은 미국의 투자확대 요구에 따라 진행 중인 현지공장 설비공사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공장설립과 초기 설비작업에는 숙련된 전문기술자가 필요하다. 첨단산업 특성상 기술유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공장설비에 투입된 300여명 한인 노동자 체포 노림수
빡빡한 일정과 비용에 맞춰 공장을 신속히 가동시켜야 하는 기업들은 꼭 필요한 기술인력 투입을 위해 전자여행허가(ESTA)나 단기 상용비자(B-1)라는 우회로를 이용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편법적인 관행에 젖어 손쉽게 일을 처리해온 잘못은 문제지만 어느날 갑자기 군대작전 하듯 대대적 단속을 벌인 것은 지나치게 무례한 짓으로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현재 미국에 진출했거나 설비 중인 우리 기업의 현지공장은 20여 곳으로 알려진다. 이번처럼 언제 어느 곳이 표적이 될지 알 수 없다면 과연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번 일은 우리 기업들의 대미투자는 물론 한미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중대사안이다. 자국 요구로 투자를 진행하는 한국기업 노동자들의 체류 지위를 보장하는 등 분명한 재발 방지대책을 미국은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업 등 다른 투자사업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것이다.
정부는 구금된 300여명에 대해 ‘자진출국’ 형식으로 귀국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밝힌다. 협상이 바로 마무리돼 다행이지만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임시처방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번 단속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지만 배경에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주권국인 한국을 만만히 보고 함부로 대하는 미국의 고질적인 태도, 오랜 동맹국으로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대우하는 자세가 결여된 오만한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의존성이 크고 일방적 압력에 저항하기 어려운 가까운 동맹국일수록 더 가혹하게 몰아붙여 최대한 이득을 챙기려는 조폭 같은 행태는 트럼프 시대 들어 더욱 노골화했다. 한미동맹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일방적으로 무시당하면서도 제대로 된 항의조차 변변히 못한 잘못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결과일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합당한 존중 받으려면 ‘심리적 자존감’ 우선해야
한반도는 지정학상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곳이다. 우리는 미국의 억지력우산 아래 안보를 지탱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흐름이 바뀌면서 주한미군의 존재가치도 북한의 군사적 위협보다는 사실상 중국의 패권확장을 저지하고 중국을 포위하는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관세폭탄 문제와 함께 국방비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증액 압박, 그리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인정 요구 압력과 한미동맹의 현대화, 전작권 환수 문제 등과도 긴밀하게 얽혀 있다.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에는 시진핑 중국 주석 곁에 푸틴 러시아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좌우로 나란히 결속을 과시했다. 올 11월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트럼프 시진핑이 함께 참석하며 동북아에 평화적 흐름이 형성되고, 이참에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만남을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한때 일기도 했으나 지금으로선 어두운 전망이 앞선다.
한반도 평화유지와 남북관계 개선에 미국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우리로서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독립국 주권국으로서 걸맞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적인 자세가 우선해야 한다. 늘 미국에 주눅 들어 눈치만 살피던 ‘정신적 종속상태’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심리적 자존감을 지녀야 한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선 떠오르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긍심과 자신감을 가져야 자주국방도 가능하고 자립외교도 가능해진다. 그리해야 주변 강대국들이 만만히 보지 못하고 이들의 부당한 압력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다. 주권국으로서의 자존감을 살리고 존중을 받는 위상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