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는 생활과 예술이 접목된 장식미술이었다

2025-09-11 15:22:43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국제적 New Art 운동, 곡선과 장식 미가 강조된 생활 미술 (17)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로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 미술에 이어 모더니즘 미술의 서곡인 인상주의,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 본 막인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사회는 산업혁명의 심화, 과학기술의 발달, 제국주의의 확대 등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미술은 ‘시대의 실험’이 되었다. 이로써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고 ‘모더니즘 미술’이 새롭게 등장한다.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반 들어 색채와 형태를 해방한 프랑스의 야수파, 입체파,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에 이어 동시대에 범유럽적으로 나타난 아르누보와 빈분리파 미술을 살펴본다.

아르누보(Art nouveau)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미술사조다. 아르누보는 불어로 새로운 미술(New Art)을 의미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잡지 유겐트의 이름을 따서 유겐트 슈틸 (Youth Style)로 불리는 등 국가별로 명칭은 달랐다. 그런데 왜 범유럽적으로 나타났는가? 크게 보면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하나는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비주류예술가들의 도전이다. 19세기 후반 들어 소위 그들만의 리그인 아카데미즘은 공공의 적이었다. 이는 프랑스의 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야수파–입체파, 독일의 표현주의, 오스트리아의 빈분리파 등의 아방가르드 미술, 즉 모더니즘 미술을 불러왔다. 다른 하나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반동이다. 이는 전 유럽의 아르누보, 즉 예술과 생활이 접목된 신 미술 운동을 불러왔다. 그러나 유럽 각국의 아르누보는 이 두 가지 요인의 비선형적인 상호작용으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아르누보는 미술사조이면서 생활과 예술이 접목된 장식미술이었다. 그렇기에 15~17세기의 르네상스처럼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곡선미와 장식 미가 회화, 건축, 가구, 공예를 넘어 생활 전반에 활용되면서 생활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생활인 미술이 된 것이다.

한편, 일본 도자기 등의 포장지인 우키요에(목판화)의 유려한 곡선은 예술가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으며 자포니즘(Japonism)은 신예술에 대한 동경과 장식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아르누보는 미술사조이면서 생활 미술로서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던 벨에포크 (Belle Époque, 1871~1914, 아름다운 시대)시기에 짧지만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아르누보는 영국의 예술·공예운동과 라파엘 전파의 나비효과로 창발

아르누보는 대략 1890년대에서 1910년대 초까지 프랑스,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그렇기에 그 배경을 획일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텍사스에 폭풍이 온다”라는 나비효과와 같았다. 복합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으로 창발(Emergency)한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그 연원은 19세기 중반 이후 기계화와 대량생산으로 조악해진 공예품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영국의 예술·공예 운동(Arts & Crafts Movement)과 여성과 자연의 곡선미, 장식 미를 추구한 라파엘 전파의 예술적 흐름이 대륙으로 넘어오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자연 곡선 + 장식성 + 총체 예술’의 개념이 유럽의 지역적 특성과 접목되면서 아르누보 미술로 변주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일 출신으로 1895년 파리에서 메종드 라르 누보(Maison de l’Art Nouveau, 신예술의 집)라는 화방을 연 지그프리트 빙이 아르누보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유럽의 미술 수도인 파리에서 장식미술과 일본 미술품을 기획, 전시, 거래하면서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게 아르누보는 빙의 화방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9세기 말 유럽은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나타난 아르누보는 예술을 주류화단과 귀족의 전유물에서 끌어내려 대중의 일상 속으로 가져왔다.

아방가르드 미술이 화단의 민주화라면 아르누보는 생활 속 예술의 민주화였다. 국가마다 아르누보의 이름은 달랐으나 이를 주도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에게 공통의 미학이 있었다. 즉, 철, 유리, 시멘트 등의 신소재를 활용하여 곡선과 장식, 자연적 모티브를 활용한 예술과 생활의 통합이었다. 한마디로 총체적 생활 미술의 구현으로 이는 곧 아르누보 미술의 감상 포인트며 특징이 된다.

아르누보 미술은 회화보다는 건축, 공예, 가구 등이 중심인 생활 예술

필자는 지난해 6월 5일에서 7일간은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 6월 12일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 7월 19일부터 22간은 빈의 세체시온 전당, 프라하의 무하 미술관, 8월 3일부터 5일간은 브뤼셀의 오르타 박물관 등을 방문하면서 아르누보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아르누보는 회화보다는 건축, 공예, 가구 등이 중심이었다. 곡선, 꽃과 식물, 여성을 모티브로 생활 예술을 추구한 아르누보는 미술관보다 거리에서 더욱 실감이 났다.

바르셀로나가 그랬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밀라, 카사 바트요의 유기적인 곡선, 구엘 공원의 모자이크 장식은 생활이 곧 예술임을 말해주었다. 그야말로 가우디 건축물은 바르셀로나 관광의 백미였으며 그 자체가 아르누보 미술관이었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 도시인 바르셀로나의 태양은 6월 초에도 사정없이 뜨거웠다. 그나마 이탈리아의 젤라토에 버금가는 스페인의 명물 아이스크림인 야오야오가 도보여행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오르세 미술관의 아르누보 전용관(2층)은 벨에포크 시기의 가구, 공예, 장식물 등의 보고로 파리 시민들의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브뤼셀의 오르타 박물관은 “직선은 없다, 모든 것은 곡선이다”라고 주장한 아르누보 건축가인 오르타의 자택과 스튜디오로 곡선의 철제계단, 스테인드글라스 창 등은 삶이 곧 예술임을 말해주었다.

빈분리파의 전시장이었던 세체시온 전당은 황금빛 돔과 클림트가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시각화한 ‘베토벤 프리즈(34m)’는 압권이었다. 아르누보 미술은 해당 국가와 장르가 많아서 다 살펴보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파리에서 아르누보 스타작가로 명성을 날렸던 알폰스 무하의 작품,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건축물, 파리의 헥토르 기마르를 대표적으로 살펴본다.

무하의 ‘지스몽다’는 포스터를 예술로 편입시킨 아르누보 회화의 대표작

알폰스 무하(1860~1939)는 곡선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한 화가이면서 포스터, 잡지, 광고 삽화, 장식패널 등에 이르기까지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면서 예술을 대중문화로 꽃피운 대가였다. 체코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던 무하는 젊은 시절에는 빈에서 무대 배경 제작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회사가 불이 나서 문을 닫게 되자 1887년 파리로 이주하여 포스터, 광고 삽화가로 생계를 이어간다. “행운은 새벽녘에 조용히 문을 두드린다”라는 말처럼 무하에게 행운은 그렇게 찾아왔다.

1894년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에 한 인쇄소가 주문받은 ‘지스몽다’ 연극 포스터를 급히 찍게 되었는데 지인의 부탁으로 그곳에서 교정일을 보던 무하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지스몽다는 유명 여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주인공인 연극의 이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스몽다(1895)’ 포스터는 파리를 화려하게 장식했고 무하는 하룻밤 사이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 단순한 광고 포스터를 넘어 포스터를 예술로 끌어올린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 후 베르나르는 무하의 감각을 높이 평가하여 그와 6년 전속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박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봄
봄(그림1)

1896년에 무하는 계절을 꽃과 여성으로 의인화한 포스터 ‘4계’를 제작하였다. 우아한 곡선의 머리카락, 꽃과 자연을 모티브로 장식미가 강조된 아르누보 양식이다. 지스몽다가 출세작이라면 4계는 성공작이었다. 프라하의 무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1896, 103x 54, 판화, 출처: 위키미디아 공용)’은 4점의 판화 시리즈 중 하나다(그림 1). 봄을 꽃과 새, 싱그러운 여인으로 표현했다. 이어 무하는 황도 12궁, 꽃, 별, 보석 등의 연작을 흥행시키면서 아르느보의 아이콘으로 부상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무하 스타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무하는 파리에서 20여 년간 활동하면서 아르누보의 대가로 성공하였으나 항상 고향인 보헤미아(체코)를 그리워했다. 1910년에 귀국한 무하는 체코 민족과 슬라브인의 역사를 찬미하는 역작 ‘슬라브 서사시’를 약 20년에 걸쳐 완성한다. 그러나 나치 점령 시기에 민족주의 화가로 낙인찍혀 게슈타포에게 고문을 당한 후 병세 악화로 1939년에 사망했다. 이렇게 무하는 프랑스에서 아르누보의 대가로 성공한 후, 고국인 체코에서는 민족 예술가로 추앙받는 화가가 되었다.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스페인 거리의 명작

다음은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인 안토니 가우디(1852~1926)의 건축물이다. 스페인 아르누보는 젊은이들의 예술(Youth Art)이라는 의미의 모데르니스모(Modernismo)로 불리는데 가우디 건축 양식이 대표적이다. 가우디는 로마네스크, 고딕, 이슬람 양식이 공존하는 카탈루냐 지방의 구리세공 장인의 아들로 태어나 났다. 아버지로부터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어릴 적부터 손기술과 상상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졸업 때 학교장은 “이 청년이 천재인지, 미치광이인지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바르셀로나 시청의 프로젝트 등을 수주하며 건축가의 길을 걷는다.

1983년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이며 섬유 사업가로 큰 부를 이룬 구엘 백작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무하처럼 행운이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것이었다. 구엘 가문의 건축가가 되면서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물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 구엘 저택, 구엘 공원 등 총 7개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거리의 명작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그림 2)
그림3
그림3

그 가운데 압권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정 대성당) 성당’이다(그림 2). 이 성당은 건축이 미술에서 분리되기 이전에 건축의 미술적, 기술적 성격이 공존한 마지막 건축물이다. 우선 성당 앞에 서면 압도감을 느낀다. 인간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숲 같은 건축이다. 솟아오른 첨탑, 파사드 (탄생, 수난, 영광의 문)의 구조는 자연의 일부처럼 다가온다(그림 3). 건물 전체는 직선보다 유기적인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잎사귀, 꽃, 과일 모양의 장식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실내로 들어서면 나무처럼 치솟은 기둥과 스테인글라스로 비치는 형형색색의 햇빛에 경외감을 느낀다. 사전 예약을 하고도 검색을 받기 위해 땡볕 아래 장시간 줄을 서지만 걸작은 이를 보상해 주기에 충분하다.

성당은 가우디가 자주 찾았던 바르셀로나 근교의 몬세라트(Monserrat) 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톱니 모양의 산으로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성모 숭배 중심지로 장관이다. 가우디는 평소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곡선은 생명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연을 최고의 스승으로 여겼다. 그러나 성당은 가우디의 미완성 유작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1926년 성당 공사 중 기도를 하러 길을 건너다 전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입은 옷이 너무 남루해서 행인들조차 그가 가우디인 줄 몰랐다고 한다. 죽기 전까지 성당 건설에 자신의 혼을 다 바친 것이다. 성당은 그를 기리기 위해 그의 시신은 성당 지하에 안치하였으며 2026년은 그가 죽은 지 100주년으로 주요 구조물의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멋지게 완공되어 천재 건축가의 영혼을 달래주길 마음속으로부터 빈다.

헥토르 기마르의 Abbesses 지하철역은 프랑스 아르누보 건축의 상징

Abbesses 역
Abbesses 역(사진 4)

마지막으로 프랑스 아르누보를 간단히 살펴본다. 당시의 프랑스는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회화의 전성기라서 아르누보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파리는 젊은 예술가인 헥토르 기마르의 지하철 같은 건축물 장식물 등을, 낭시는 공예 가구 등을 중심으로 아르누보가 꽃을 피웠다. 일명 ‘기마르 지하철’ 역은 1900년 파리의 교통난을 해소하고 만국박람회 개최에 맞춰 파리 전역에 140여 개소 이상 설치되었다.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는데 그 중 몽마르트르 언덕 초입에 있는 Abbesses 역(사진 4)은 아르누보 도시 미학의 상징이다.

아르누보는 지하철 자체가 아니라 역의 입구를 장식한 디자인을 말한다. 당시의 신소재였던 주철과 유리를 사용하여 철제기둥은 덩굴과 식물의 줄기처럼 곡선미를, 지하철 간판의 타이포그래피(글씨체)는 장식 미를 보여준다. 당시의 파리 시민들로부터는 낯선 곡선과 화려한 장식이 괴상하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오늘날은 파리시의 예술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Abbesses 역은 피카소, 모딜리아니, 로트렉 같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아지트였던 ‘바토 라부아르’로 가기 위해 발길이 닿던 곳이며 근처에는 약 250여 국의 언어로 쓴 ‘사랑해 벽’, 캉캉 쇼로 유명한 ‘물랭루주’ 등이 있어 이 역을 이용하면 몽마르트르를 둘러보기 좋다.

아르누보는 국제적 네트워크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

이렇게 아르누보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공예, 가구, 디자인 등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 꽃핀 미술사조이면서 범유럽적인 신예술(New Art) 운동이었다. 아르누보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한 것은 무하, 가우디 등과 같은 혁신적인 미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나 프랑스의 야수파, 입체파, 독일 표현주의 등의 모더니즘 미술이 폭발하면서 그 여파로 주변 유럽국가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여기서 아르누보는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른 기계화, 대량생산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곡선의 미학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둘째, 예술과 생활의 통합으로 아르누보는 오늘날 디자인, 브랜딩의 뿌리가 되었다. 셋째, 아르누보는 국제적 네트워크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하였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교통, 신문, 출판, 유통의 발달, 박람회, 전시회, 화상, 수집가 등의 네트워크 형성, 예술가 간 교류와 학생들의 유학, 급속한 도시화에 따른 주택, 상점, 카페 등의 장식수요에 따른 결과였다. 이제 프랑스, 벨기에, 독일, 스페인, 체크 등과는 달리 동시대 오스트리아에서는 아르누보의 미학을 계승하면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몰락기의 시대적 불안을 표출하고 예술의 자유를 추구하는 빈분리파 미술이 출현하였다.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