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김대중 망명일기’ 공동기획한 장신기 박사

“유능한 정치 리더, 지지층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2025-09-18 13:00:03 게재

“망명 기간 중 이미 ‘민주화 이후’ 국정 운영 전략 준비”

“정치·국정 성공 못하면 반동으로 뒤집힐 가능성 염두”

“김대중정신, 원칙 초석 위에서 유연하게 성과 내는 것”

1972~1973년 1차 망명때 작성한 6권 수첩 정리해 공개

2024년 12.3 내란사태와 비슷하게 친위쿠데타로 불리는 52년전 1972년 10.17 비상계엄사태가 재소환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차 망명당시(1972~1973년)에 썼던 6권의 일기가 발견됐고 지난해 11월말부터 정리에 들어갔다. 우연찮게 윤석열 전 대통령은 12월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김 전 대통령의 망명 일기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성공했다면 이뤄질 많은 일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 일기들을 엮은 ‘김대중 망명일기’(한길사)는 그동안 김 전 대통령에 의해 구술로만 전달됐던 ‘1차 망명 시기’의 베일을 완전히 벗겨냈다. 그는 수첩에 망명기간 중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만났던 인사들과 활동들을 간략하지만 정확하게 기록해 놨다. 박정희정부 정보요원들에 의한 감시와 함께 미국과 일본이 박정희정부를 용인하는 국제관계의 냉엄함에 실망감을 표하는 대목도 담겨 있다. 그는 언론을 통해 박정희 독재와 비상계엄의 부당함을 미국과 일본, 독일(서독) 등에 알렸고 각 지역에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등 해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반독재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큰 위협이 됐고 결국 ‘김대중 납치’까지 이르게 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면서 이 책은 성과를 내는 ‘김대중 정신’과 함께 망명기간 중에 이미 ‘민주화 이후’를 준비한 흔적들을 담아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사료연구담당인 장신기 박사는 1년 남짓 김 전 대통령의 망명일기를 정리하고 판독했다. 20여 년간 ‘김대중’만 파온 ‘김대중 박사’인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 1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진행됐다.

사진 이의종

●1차 망명 기록이 없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확인된 게 뭔가.

민주화운동 역사는 아직 체계화돼 있지 않다. 특히 해외 민주화 운동을 다룬 것은 거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망명 활동은 해외에서의 활동이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

엄혹했던 유신은 작년 전직 대통령 윤석열 씨의 12.3 비상계엄과 내란의 원형이 되는 사건이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 선포는 결국 헌법 기능을 일부 정지시키면서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으로 넘어가는 유신 체제로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은 수첩에 당시 사건 자체와 상황을 매일 기록했다. 당시 어떻게 활동했고 누구를 만났고 거기에서 무슨 얘기가 있었고 그 결과는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유신 체제 초기에 큰 균열이 가게 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다.

●일기엔 당시 만났던 인물이 대거 나와 있는데 이게 중정 등에 들어갈 경우상당히 곤란했을 것 같은데.

간단한 메모 정도 할 수 있는 일정 수첩이라고 볼 수 있다. 주머니에 소지할 수 있는 크기다. 김 전 대통령은 테러에 대한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해외에서 당장은 귀국할 생각이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투쟁 의지를 갖고 계셨다. 생과 사를 오가는 위기의 순간을 계속해서 본인의 의지와 신념으로 돌파해 나가는 궤적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기록들 자체가 발각이 되거나 박정희정부 측에 넘어가게 되면 탄압의 빌미가 될 수 있겠지만 수첩에 적힌 분들은 신분이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인 신분이라 우리나라 공권력이 직접 개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박정희정권의 비상계엄이 배경이다. 12.3 내란과 겹치는 대목들도 있다.

망명 첫날 ‘나는 단장의 심정으로 이 일기를 쓴다’라고 적혀 있는데 이 글귀를 처음 봤을 때 굉장한 전율을 느꼈다. 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게 작년 11월말, 12월 초다. 12.3 내란 비상계엄때다. 윤 전 대통령이 통치 전략 차원에서 단행했던 비상 계엄은 바로 1972년 10월 17일(10월 유신) 박정희정권의 비상계엄과 같다. 52년 만에 다시 친위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엔 비상계엄에 저항하기 어려웠다.

당시 비상계엄이 터졌을 때 즉각적인 성명을 내고 반대 투쟁을 전개한 사람은 국내외를 통틀어 김 전 대통령이 유일했다. 김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다음 날인 18일에 도쿄에서 비상계엄 반대 성명을 냈다. 그러고는 이 비상계엄을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한 친위쿠데타, 반헌법적 행동으로 규정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서독)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시도했고 유럽까지 한국과 한국 상황을 알게 됐다. 뉴욕타임스에 기고문이 실리기도 했다. 외신을 통한 보도는 박정희정권에 어마어마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망명 정치인의 입장에서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양대 우방국이자 전략 국가인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과 기반을 구축하다 보니 굉장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거다. 이같은 상황은 중정에 의해 납치(1973년 8월 8일)된 후 ‘살아 돌아온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다. 박정희정권의 공작은 어려워졌다. 김 전 대통령이 너무 알려졌고 반정부 주요 인사의 리더였다. 외력에 의해 문제가 생긴다면 박정희 정권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가 박정희 정권을 용인하거나 인정하는 냉엄한 국제관계를 직접 경험하면서 실망하기도 했다. 이후 외교안보 관계에 대한 관점에서 상당한 자양분이 됐을 것 같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쟁과 분단, 독재를 경험하면서 국내문제가 국제적인 역학관계와 맞물려야 풀린다고 봤다.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미국의 상황과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민주화를 이뤄내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략적으로 한국 민주화를 위한 민간 외교의 중요성을 간파하고는 미국의 대외 정책의 전환을 유도하려고 했다. 이러한 노력이 15년 후인 1987년에 전두환의 군대투입을 미국 정부가 반대하게 만들었다. 민주화 이행의 결정적인 순간에 축적된 역량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다.

미국의 정책이 변하게 된 것도 김 전 대통령이 1차 망명 때부터 구축했던 해외 민주화 운동조직이 70년대와 80년대에 줄기차게 노력한 결과물이다. 미국과 일본의 주요 정치인과 계속 교류하고 미국 내에서 한국 민주화에 대한 여론을 강화했다. K-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의 분투와 고투가 얼마만큼 기여했는지가 이 책에 그대로 담겨 있다.

●1997년 대선 승리 보다 무려 25년 전인데 벌써 집권이후를 준비했다.

민주화를 해야겠다는 절체절명의 과제는 명확했다. 그러면서도 민주화가 되고 난 다음을 생각했다. 민주주의가 더 성숙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정을 잘해야 된다, 정치가 성공해야 된다는 얘기가 수첩 곳곳에 여러 차례 나온다. 준비해야 된다는 거였다. 망명 중에도 독재 체제 타도에 이어 민주주의가 안착되고 국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결국은 정치가 잘 돼야 되고 이를 하기 위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4.19에 대한 반면교사가 아니었을까.

대중적인 인기를 통해 구 체제를 우선 타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 성공적인 정치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해 다시 반동의 계기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일기에 담았다. 헌법만 바꾸면 되는 게 아니므로 민주화 이후에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안착과 발전으로 반동을 차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어록 중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 발언은 최선이 아니면 차선,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할 것과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는 발언 뒤에 나왔다. 언제 나온 얘기인가.

이 말은 1967년 대통령의 첫 번째 저서인 ‘분노의 메아리’에서 처음 나온다. 김 전 대통령은 이에 앞서 세 가지 중요한 경험을 한다.

해방 공간에서 청년시절에 여운형 김규식 등 당시 중도파 민족주의 입장을 지지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을 독립운동가로서는 매우 존경했지만 현실 정치가로서는 아쉽게 생각했었고 그런 과정에서 결국 이승만 정권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봤다. 두 번째 경험은 4.19 이후의 제2공화국이다. 당시 민주당 대변인이었다. 당 대변인으로 혁신계의 장면 정부에 대한 비판에 ‘민주 정부를 우선 안착시켜야 한다. 그렇지 못해서 불행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경우 당신들이 먼저 당하게 된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됐다. 세 번째는 한일회담이다. 한일회담은 미국의 요구였기 때문에 한국이 무조건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최대한 관철시킬 수 있도록 국력을 모으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반대파 의견을 억누르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고 야당의 강경파는 반일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대안도 없이 일방적인 반대만을 전개하며 김대중 같은 합리적인 세력을 ‘사쿠라’라고 매도했다. 정치가 고고한 가치 이념을 중시한다 하더라도 실현시키는 결과의 측면도 중시해야 된다고 본 거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결과를 내는 게 쉽지는 않다.

‘정치는 진흙탕 속에 피는 연꽃과 같다’는 말을 했다. 원칙을 지키면서 결과를 내기 위해서 타협도 해야 된다.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정치가 재조명 받는 이유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주고받는 정치, 일을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기대치다. 당시엔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20년 여년 지나다보니 이런 것들이 안 되는 시기를 많이 본다. 김종필 씨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 등 선을 넘는 게 있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원칙으로 든든하게 초석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유연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실제 국정운영에도 반영하려 했나.

김 전 대통령이 집권시절에 여야 영수 회담을 제일 많이 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정당 정치, 의회 민주주의의 역사적인 모범이나 규범으로 볼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소위 말하는 카리스마형 지도자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권위주의는 공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힘을 갖고 압박하는 거고 권위는 대중적인 동의와 지지를 통해 형성되는 정치적인 힘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게 확고했던 인물이다.

본인의 지지층에만 소구하는 걸 했다면 포퓰리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김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화해 통합을 위한 과거 청산이다. 전두환 노태우 사면(1997년 12월 22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했지만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동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 평화 통일을 해야겠다는 장대한 꿈을 갖고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한일 간의 협력도 해야 했다. 남북 간에 화해 통합이라는 게 동북아 질서의 재구축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도 열어야 했다. 북한과의 화해 협력에 앞서 일본과의 화해협력을 했다. 1998년 10월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2000년 6월에 6.15 공동선언이 나왔다. 전두환 노태우도 사면 못할 정도면 일본의 과거사 책임 문제를 해소할 수 있었겠나. 한국 전쟁을 일으킨 북한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겠나. 과거사 문제를 김 전 대통령은 전방위로 본 거다.

●서생과 상인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현실 감각은 현실정치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유능한 정치 리더는 본인의 지지층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된다. 자유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다원적이다. 정치적인 비전을 구현해 나갈 때 절대 포기하지 않는 선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계속 끌어들여 우군을 넓혀가는 전략이어야 한다. 국민통합이라는 게 최소한 상대방의 반대 목소리 자체를 약화시키게끔 하고 자신의 정책에 대한 지지 기반을 확산시켜 나가는 거다.

김 전 대통령은 집권 1년 차에 지지층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전광석화처럼 자신들의 요구 사항들을 빨리 실현시켜주기를 기대했던 거였다. 그런데 김 전 대통령은 국가적 부도 위기 상황에서 전략적인 판단을 했다. 힘을 비축하는 시기였다. 국가가 망하면 그다음에 뭘 하겠나. 그런 토대를 쌓고 난 다음부터 보수진영이 반대한 제주 4.3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등 본인이 하려 했던 것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박준규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