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분리파 미술은 장식을 넘어 인간 내면의 시각언어였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시대의 예술, 예술의 자유’를 추구한 미술(18)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로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 미술에 이어 모더니즘 미술의 서곡인 인상주의,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 본 막인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사회는 산업혁명의 심화, 과학기술의 발달, 제국주의의 확대 등으로 정신적 위기를 맞이하면서 미술은 시대의 실험이 되었다. 이로써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고 모더니즘 미술이 새롭게 등장한다. 미술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제 20세기 초반 들어 색채와 형태를 해방한 프랑스의 야수파, 입체파,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에 이어 동시대에 범유럽적으로 나타난 아르누보와 빈분리파 미술을 살펴본다.
빈 분리파(Wiener Secession) 미술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오스트리아의 빈(Vienna, 비엔나)에서 등장한 미술이다. 분리파 명칭은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와 동료들이 빈의 아카데미 미술에 반발하여 전통 화단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하면서 유래되었다.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분리, 또는 이탈이 아니었다. 신예술(New Art)을 추구하겠다는 혁신적인 미술가들의 자유 선언이었다. 그러나 빈 분리파 미술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스페인 등의 아르누보 미술과는 결이 달랐다. 아르누보의 곡선미와 장식 미를 계승하였으나 이를 인간의 내면세계로까지 확장한 것이다. 즉, 사랑, 성, 고통, 고독, 죽음, 구원 등과 같은 인간 내면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풀어낸 아방가르드 예술이자 모더니즘 미술이었다. 그렇기에 빈 분리파 미술은 단순히 눈으로 읽는 미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시각언어였다.
또한, 빈 분리파는 화가뿐만 아니라 건축가, 가구, 조각, 공예 등 장식예술가들이 모인 연합 단체였기에 회화·건축·가구·공예 등을 하나의 통일된 미학으로 바라보았다. 삶 속에 예술을 끌어드린 미술이었으며 삶 전체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는 총체 예술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종언을 고했다. 그들의 실험은 단명으로 끝났어도 클림트, 실레의 작품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의 하나다. 특히 클림트의 명작 ‘키스’의 황금빛 장식은 인간의 감정과 내면을 찬란하게 드러낸 걸작이다. 이렇게 빈 분리파는 삶을 장식하는 미술이면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 예술을 추구함으로써 오스트리아 특유의 모더니즘 미술을 구현한 것이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추구
빈 분리파가 탄생한 배경은 다면적이다.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던 빈은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벨에포크의 황혼과 1차 세계대전의 전야 속에 다민족 제국의 균열은 깊어지고 그럴수록 제국의 권위는 강화되었으며 권위의 상징인 아카데미 미술은 경화되었다. 이는 모든 것이 잘나가던 벨에포크 말기의 빛과 그림자였고 그 빛의 이면에는 퇴폐와 불안이 그림자처럼 스며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쇤베르크의 불협화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불안을 달구는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그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897년은 오스트리아 미술의 전환점이 된다. 클림트와 동료 20여명이 아카데미의 보수화에 반기를 들면서 빈 예술가협회를 탈퇴해 빈 분리파를 결성한 것이다. 문화는 시대의 거울로 가장 예민한 미술에서부터 금이 간 것이다. 1874년 프랑스에서 인상주의 화가들이 보수적인 살롱전에 반기를 들고 독립 전을 개최한 사건과 같았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프랑스보다 20여 년이나 뒤늦게 나타난 것이다.
그들의 구호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었다. 이는 빈 분리파의 독립 전시관이었던 세체시온 전당의 정문 상단에 선언문처럼 새겨져 있다. 빈 분리파를 주도한 클림트는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회화 분야는 클림트와 그의 후계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빈 분리파 미술을 이끌었다. 이렇게 빈 분리파는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술 제도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1900년 전후에 세기말 미술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미술은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동시에 상징적이고 심리적이었다. 이는 빈 분리파 미술의 특징이면서 감상 포인트가 된다.
빈 분리파 미술의 소재는 삶과 죽음, 사랑, 성, 꿈과 무의식, 에로티시즘
필자는 7월 19일부터 21일간 빈의 벨베데레 궁전, 레오폴드 미술관, 알베르티나 미술관, 세체시온 전당 등을, 7월 29일부터 30일간은 스위스 바젤의 바젤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빈 분리파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빈 분리파 미술은 회화·건축·가구·공예 등을 아우른 총체 예술이었지만 회화가 중심이었다. 빈은 630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한 도시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기에 파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문화예술 도시다. 빈 분리파의 활동 시기는 음악, 문학, 철학 등이 폭발적으로 개화한 ‘빈 1900’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철학, 심리학, 음악 등은 빈 분리파 미술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삶과 죽음, 사랑, 성, 꿈과 무의식, 에로티시즘은 미술의 소재가 되었다.
호프부르크 궁전-쇤브룬 궁전–벨베데레 궁전-뮤지엄 쿼터(MQ)는 합스부르크 유산 루트로 빈 관광의 핵심이다. 벨베데레 궁전은 키스 등 빈 분리파 미술을 소장한 상궁과 바로크 미술 등을 소장한 하궁으로 나뉘어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별궁이며 명작도 감상할 수 있어 베르사유 궁전만큼 가성비 좋은 궁전이다. 뮤지엄 쿼터(Museum Quartier)는 유럽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복합지구다. 그곳에 가면 축구장 9배 크기의 공간에 미술관, 박물관, 전시공간이 7곳, 공연장, 문화기관 등 60여 곳이 몰려있어 빈의 과거와 현대를 함께 만날 수 있다.
레오폴드 미술관은 에곤 쉴레의 작품(자화상, 누드화, 풍경화 등)을, 오스트리아 현대미술관(MUMOK)은 피카소, 앤디 워홀, 요셉 보이스 등의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MQ 안 마당은 젊은 예술가, 관광객, 학생 등이 많이 모이는 장소다. 빈은 생크림, 또는 스팀 우유로 토핑한 비엔나 커피(아인 슈페너, 비너멜랑주)가 명물이다. 원조 격인 빈 시내의 ‘자허’나 ‘데멜’ 카페에 갈 시간이 없다면 이곳의 카페나 벤치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여유롭게 문화예술 도시 빈의 에너지를 느껴보는 것도 제격이다.
클림트의 ‘키스’는 사랑, 관능, 초월의 순간을 응축해 놓은 황금 양식의 걸작
이제 빈 분리파의 명작들을 살펴본다.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는 빈 분리파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들 3인은 ‘빈 1900’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이었다. 클림트가 황금빛 장식으로 사랑과 죽음을 은유했다면 쉴레는 그 장식을 벗겨내어 내면의 불안을 노골적으로 들어냈고 코코슈카는 그것을 폭풍 같은 색채로 폭발시켰다. 이렇게 세 사람은 스승(클림트)과 제자(쉴레), 동료(코코슈카)이자 도전자, 경쟁자로서 빈 미술을 장식에서 심리, 심리에서 표현으로 이끌었다.
그 가운데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빈 분리파의 주역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는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금 세공사인 아버지와 음악가를 꿈꾸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빈 응용예술학교에 입학, 장식미술을 배운 후 벽화, 장식화, 역사화 등을 그리면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1890년대 초 클림트는 궁전과 제국극장의 천장화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1898년 황실로부터 황금 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화된 빈 예술가협회에 반발해 1897년 빈 분리파를 창립했고 이때부터 아카데미 양식에서 벗어나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황금 양식으로 전환하였다.
클림트는 빈대학 천장화인 철학·의학·법학, 유디트, 금붕어, 베토벤 프리즈, 키스 등의 걸작을 남겼다. 그 가운데 벨베데레 궁전의 상궁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키스’(The Kiss, 1907~1908, 180x180cm, 캔버스에 유채)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1). 해마다 100만명이 이 작품을 보러 오는데도 공항에는 ‘키스를 보지 않고는 떠나지 말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이렇게 키스는 빈 관광의 최고 아이콘이자 도시 경제를 움직이는 최대 관광수입원이다. 명작은 상궁의 클림트 방 중앙에 걸려 있다.
상궁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라 개장 직후 찾아야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 정사각형 화면 가득히 서로를 감싼 연인은 꽃이 핀 절벽과 하나가 되어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듯한 느낌을 준다. 남성의 직선적인 패턴과 여성의 원형 문양은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고 금박은 비잔틴 모자이크처럼 신성한 빛을 상징한다. 인간의 사랑, 관능, 초월의 순간을 응축해 놓은 상징주의와 관능적 시선이 결합한 황금 양식의 걸작이다. 발표 당시에는 선정성 논란을 일으켰으나 점차 대중의 관심을 끌면서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클림트는 국민화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는 사랑과 죽음을 상징한 표현주의 명작
다음은 클림트의 제자이면서 후계자였던 에곤쉴레(1890~1918)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7년 빈 미술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던 쉴레(17세)가 빈 분리파의 지도자로 명성을 얻고 있던 클림트(45세)의 스튜디오를 찾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쉴레는 자신이 가져간 드로잉을 보여주며 클림트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클림트는 “내 그림보다 훌륭하다. 아카데미 규범을 따르지 말고 당신만의 길을 가라. 당신은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격려하면서 모델, 수집가, 화상 등을 연결해주었다고 한다. 쉴레의 용기도 대단하지만 클림트의 도량도 대인답다. 두 거장의 작품은 한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한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빈 1900’은 개막 첫 주말에만 6000여명이 몰릴 정도였다. 클림트의 황금빛 사랑과 쉴레의 날 선 고독이 감각적이면서도 깊은 정서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쉴레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지역 툴른의 역장인 아버지와 체코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아버지를 매독으로 잃은 기억은 그에게 깊은 상실감을 남겼으며 훗날 죽음·고독·불안을 탐구하는 그림의 원천이 되었다. 16세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 쉴레는 보수적인 교육 방식에 실망해 1909년 자퇴하고 동료들과 ‘신 예술가 그룹’을 결성했다. 아마도 1907년 클림트를 만난 경험이 그의 결심에 자극을 주었을 것이다. 1911년에는 빈 분리파 전시에 초대되어 활동했으며 초기에는 클림트의 황금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곧 왜곡된 인체, 날카로운 선묘, 강렬한 색채로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주의 화풍을 확립했다.
‘죽음과 소녀’, ‘포옹’, ‘자화상’, ‘가족’ 등은 그가 남긴 명작이다. 레오폴드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포옹’(The Embrace, 1917, 100x170cm, 캔버스에 유채)과 벨베데레 상궁이 소장하고 있는 ‘죽음과 소녀’(Death and Maiden, 1915, 150x180cm, 캔버스에 유채)는 그의 대표작이다. 모두 연인처럼 서로 껴안고 있는 두 인물을 그린 것이다.
‘포옹’(그림 2)은 남녀의 육체적 사랑과 동시에 외로움, 불안의 감정이 함께 느껴지는 이중적 감정의 표현이다. ‘죽음과 소녀’(그림 3)는 해골처럼 앙상한 죽음이 눈앞에 있는 남성에게 두려움과 애착이 뒤섞인 여성이 매달려 있다. 사랑과 죽음이 포옹하는 장면이다. 전쟁과 전염병이 창궐한 시기에 사랑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실존적 긴장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기에 쉴레는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데와 결별하고 에디트와 결혼했는데 그림 속 여인은 헤어진 발데로 추정한다. 1918년 가을, 스페인독감은 그의 사랑과 삶을 동시에 앗아간다.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세상을 떠난 지 사흘 만에 쉴레도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그림 앞에서 왜 그런지 모르게 마음이 먹먹했다.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영화 속 장면에서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그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는 격렬한 표현주의 화풍을 대변한 명작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는 클림트, 쉴레와 동시대에 활약한 3대 거장 중 한 명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포이클람의 가난한 금속공예가의 아들로 태어나 18세 때 빈 예술 공예학교에 입학, 장식미술을 공부하고 화가의 길을 걸었다. 빈 분리파의 멤버는 아니었으나 클림트의 추천으로 빈 분리파 전시에 참여하며 아방가르드 신예로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는 클림트의 장식적 양식에 영향을 받았으나 곧 쉴레처럼 강렬한 표현주의 화풍으로 전환했다.
스위스의 바젤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바람의 신부’(The Bride of the Wind, 1913~1914, 181 x 220cm, 캔버스에 유채, 위키피디아)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4). 두 연인이 폭풍에 휘 말린 듯한 격정적인 그림이다. 구스타프 말러(작곡가)의 미망인으로 빈 사교계의 뮤즈였던 알마 말러와의 극적인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915년 그녀와 결별한 후 코코슈카는 알마를 잊지 못해 실제 크기의 ‘알마 인형’을 주문해 함께 살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영화 속 이야기 같다. 1차 대전 후 코코슈카는 더욱 급진적인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결국 나치 집권 시기에 그는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혀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30년간 영국 국적자로 살며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정치적이며 풍자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비교적 평온한 그림을 그리다가 9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예술은 영혼을 위한 전쟁이다. 나는 내 영혼을 캔버스에 쏟아붓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드라마틱한 구도, 폭풍 같은 색채, 거친 붓질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격정적으로 표현한 ‘바람의 신부’는 그의 예술관을 대변한 것 같았다.
빈 분리파는 장식적, 상징적, 표현주의적 모더니즘 미술
이렇게 빈 분리파 미술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벨에포크의 황혼기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몰락이 예견된 불안한 시기에 등장했다. 아르누보를 계승했으나 반 아카데미즘과 예술의 자율성을 선언하고 인간의 내면을 탐구한 시각언어였다. 즉, 빈 분리파는 장식적, 상징적 성격이 강한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이면서 ‘빈 1900’시기 표현주의적 모더니즘 미술의 출발점이었다.
여기서 빈 분리파 미술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권위적인 아카데미 즘에 도전하며 장식미술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는 훗날 바우하우스, 현대 디자인, 모더니즘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둘째, 미술이 삶의 일부가 되는 총체 예술을 구현함으로써 미술을 일반 민중의 삶의 질을 제고시켰다. 셋째, 이념적, 양식적 기반은 빈약했기에 사조로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사랑, 에로티시즘, 고통, 죽음 등의 주제로 세기말적 미술로서 자리매김하였다. 그렇기에 빈 분리파는 표현주의 미술에 이어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미술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빈 분리파는 종언을 고했으며 그 해체는 전쟁의 혼돈 속에 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 미술의 등장을 예고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