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는 전후 미술의 두 얼굴이었다

2025-10-16 14:27:10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해체와 재구성, 혼돈과 질서의 미학 (19)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로 인문주의의 꽃을 피운 르네상스, 감정의 격정을 드러낸 바로크와 로코코, 이성과 이상을 추구한 신고전주의, 인간의 감성을 해방한 낭만주의, 현실을 직시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와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이제 재현의 고전미술은 표현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다. 본 글은 이어서 모더니즘의 본 막으로 색채와 형태를 해방한 프랑스의 야수파와 입체파,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독일의 표현주의, 그리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아르누보와 빈 분리파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와 반성 속에서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가 등장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은 더욱 심화되고 확장된다.

다다이즘(Dadaism)과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와 전쟁의 반성 속에서 태어난 미술이다. 두 사조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상처를 공유했으나 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예술적 지향점은 달랐다. 다다이즘은 전쟁을 가능케 한 근대문명의 합리주의와 그 허구성을 부정하며 기존 예술 제도의 권위를 조롱하고 해체하는 혼돈의 미학을 추구했다. 반면 신즉물주의는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사회를 다시 세우려는 질서의 미학을 지향했다. 즉, 전자는 질서를 부정한 혼돈의 언어였고 후자는 현실을 해부하고 다시 세운 질서의 언어였다. 이렇게 두 미술은 전쟁의 상처를 예술로 치유한 전후 미술의 두 얼굴이었다.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1916년에 태동한 다다이즘은 전쟁과 징집을 피해 모여든 망명 예술가들의 반항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다다이즘은 파리, 베를린, 뉴욕 등지로 확산하면서 전쟁에 대한 저항과 부조리·무질서의 미학으로 변주되었다. 반면, 패전국 독일에서 태어난 신즉물주의는 표현주의의 격정과 주관성을 거부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사회와 인간을 응시하며 사실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질서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현실의 부패와 상처를 직시함으로써 얻어지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었다. 이처럼 두 사조는 혼돈과 질서라는 상반된 길 위에서 전후 인간의 존재와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미술이었다.

다다이즘은 혼돈의 얼굴, 신즉물주의는 질서의 얼굴

사상 초유의 세계 대전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예술가들은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시각언어를 찾고자 했다. 1916년 스위스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탄생한 다다이즘은 그 출발점이었다. 그곳에서 후고 발, 트리스탄 차라, 한스 아르프 등은 무의미한 시와 우연적이며 풍자적인 그림, 기괴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예술은 무의미하다”라는 선언을 외쳤다. 한마디로 반(反)예술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다이즘은 예술은 어디서든 태어날 수 있으며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전쟁을 피해 파리에서 뉴욕으로 건너간 마르셀 뒤샹은 ‘샘’(1917)을 통해 이 정신을 이어갔다. 그가 만 레이 등과 함께 전개한 뉴욕 다다이즘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다다의 개념을 확장시켰다.

신즉물주의는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등장했다. 표현주의가 내면과 주관을 강조한 뜨거운 예술이었다면 신즉물주의는 전쟁 이후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한 차가운 예술이었다.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츠, 막스 베크만 등은 차갑고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전후 독일 사회의 허무와 타락, 정치적 긴장, 부르주아의 위선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딕스의 ‘전쟁(1929~1932)’은 참혹한 전장을 미화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였으며 그로츠의 ‘사회 기둥들(1926)’은 정치인, 성직자, 언론인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풍자였다. 이처럼 다다이즘은 모든 질서를 해체해야 한다는 혼돈의 얼굴이었고 신즉물주의는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질서의 얼굴이었다. 이러한 점은 두 미술의 본질이면서 감상의 포인트가 된다.

다다이즘은 중립국인 스위스, 신즉물주의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등장

필자는 지난해 6월 11일부터 13일간은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7월 24일부터 26일간은 베를린의 국립미술관, 신 국립 회화관, 국립 현대미술관을, 7월 29일에는 스위스 바젤의 바젤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두 미술은 생각보다 많이 접하지 못했다. 다다이즘은 스위스에서 탄생 후 베를린·파리·뉴욕 등으로 퍼져나갔고 신즉물주의는 독일의 베를린·드레스덴·쾰른·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나타났기에 작품은 분산되어 있었다. 더구나 나치 집권기에는 모두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많은 작품이 해외로 유출되었으며 화가들도 망명하면서 주요 작품은 함께 가져갔다고 한다. 또한 20세기 초반에는 두 사조 모두 정통 미술사조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국가 차원의 수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유럽 내 작품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유명한 명작들은 복제품이었다.

다다이즘의 발상지인 취리히 미술관, 베른의 파울 클레 센터, 바젤 미술관은 스위스를 대표하는 3대 미술관이다. 특히 매년 6월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Art Basel)은 국제 미술시장의 중심이자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축제다. 스위스는 융프라우로 상징되는 알프스 관광의 나라지만 취리히·베른·바젤을 함께 찾는다면 알찬 미술 여행이 된다. 한편 베를린은 세계미술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시기에는 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가 가장 활발히 전개된 도시였다. 그러나 나치 집권기(1933~1945)에 모더니즘이 퇴폐미술로 탄압받고 많은 예술가가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미술의 중심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오늘날 베를린의 5개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이 모여 있는 박물관 섬을 비롯해 유대인 박물관, 베를린 장벽(1.3km) 예술 거리에서 두 사조를 포함한 독일미술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뒤샹의 샘은 레디메이드 변기로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선언문

이제 다다이즘의 명작을 살펴본다. 다다이즘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마르셀 뒤샹(1887~1968)은 그 정신을 가장 과감하게 실험한 혁신가였다.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출신으로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와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7세에 파리의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해 그림을 배웠으나 정규 과정을 오래 다니지는 않았다. 20세 무렵부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입체파 양식을 탐구하며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과 징집을 피해 1915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1917년 미국 독립미술가협회 전시에 변기 하나를 작품으로 출품했다. 그것이 바로 다다이즘의 상징이자 현대미술의 혁명으로 평가받는 샘(Fountain)이었다.

샘
샘 복제본(그림 1)

샘은 뒤샹이 철물점에서 구매한 레디 메이드(Ready-made), 즉 기성품이었다. 원래 이 전시는 심사 없이 출품료만 내면 누구나 전시할 수 있었지만 작품은 협회 내부의 결정으로 전시장 밖으로 밀려났다. 이후 원작은 사라졌고 뒤샹이 인정한 복제본만이 남아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 등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필자는 퐁피두센터와 테이트 모던 두 곳에서 복제본(Fountain, 1917, 36×48×61cm, 자기 변기, 출처: Wikimedia)을 만날 수 있었다(그림 1). 작품은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이며 R. Mutt라는 서명은 변기 제조사 J.L. Mott Iron Works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뒤샹의 친구이자 사진가였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이 작품을 ‘Blind Man’이라는 잡지에 게재하면서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다. 이제 샘은 단순한 변기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상징이 되었다. 뒤샹은 이 작품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물었다.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은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평론가들은 이를 예술의 권위를 무너뜨린 행위로, 예술사학자들은 개념미술의 출발점으로 평가했다. 2004년 영국의 아트 리뷰(Art Review)는 샘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선정했다. 결국 뒤샹의 의도는 적중했다. 그는 예술이 더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 개념적 행위임을 입증한 것이다. 즉, 작품의 본질은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선택과 선언에 있었다. 이렇게 샘은 현대미술을 연 기념비적 선언이자 사고와 개념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미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예술 매체의 경계를 허문 기념비적 선언

앵그르의 바이올린
앵그르의 바이올린(그림 2)

다음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사진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만 레이(1890~1976)다.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했다. 처음에는 회화를 배웠으나 곧 사진과 실험적 예술에 몰두했다. 1915년 뒤샹이 뉴욕으로 건너왔을 때는 그와 함께 뉴욕 다다를 이끌었고 1921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뒤샹과 교류하며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펼쳐나갔다.

파리의 퐁피두센터가 소장한 대표작 앵그르의 바이올린(Le Violon d’Ingres, 1924, 28.9×22.7cm, 은판 인화 흑백사진, 출처: Wikimedia) 은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2). 이 작품은 연인이었던 몽파르나스의 등을 촬영한 누드 사진 위에 바이올린의 f-홀(f-holes)을 합성한 것이다.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가 즐겨 그린 여성 누드와 그가 사랑한 악기 바이올린에서 착안한 발상이었다. 작품은 당시 충격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육체를 악기로 치환함으로써 성적 상징성과 예술의 대상화 문제를 동시에 드러냈으며 사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상징과 개념을 담아낼 수 있는 예술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단순한 누드사진이 아니라 20세기 초 예술 매체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시각언어를 제시한 아이콘으로 평가된다. 그 위상은 2022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1210만달러(약 160억원)에 낙찰되며 재확인되었다. 이처럼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뒤샹의 샘과 함께 다다이즘의 정신인 전복과 해체, 그리고 개념의 우위를 구현한 작품으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선언이었다.

오토 딕스의 전쟁은 전쟁은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신즉물주의 걸작

신즉물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는 오토 딕스(1891~1969)다. 그는 1891년 독일 괴를리츠에서 태어나 드레스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젊은 시절부터 사실적이며 강렬한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서부전선에서 참호전을 겪으며 전쟁의 잔혹한 현실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가 “전쟁은 내게 그림의 학교였다”라고 회고할 만큼 딕스의 작품 세계를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전후 독일은 패전의 충격 속에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붕괴에 빠져 있었다. 그는 표현주의의 주관적 감정 대신 냉정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그려내는 신즉물주의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전쟁
전쟁(그림 3)

드레스덴의 알버티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쟁(Der Krieg, 1929~1932, 204×285cm, 목판 유화)은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3). 딕스는 전쟁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을 예술로 기록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작품은 4폭 연작으로 제단화 형식이다. 1929년부터 3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중세 제단화에서 영감을 받아 성스러운 숭고함과 전쟁의 지옥을 병치시킨 것이다. 왼쪽 패널에는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의 행렬, 중앙 패널에는 참호 속의 부패한 시체와 쓰러진 병사들의 처참한 광경, 오른쪽 패널에는 부상병을 구하는 병사와 귀향하는 병사들의 모습, 하단의 기단부에는 딕스 자신이 들것에 누워 있는 부상병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이렇게 딕스는 전쟁을 영웅의 서사가 아닌 인간 파괴의 기록으로 그린 것이다. 그것은 시대의 목격자이자 생존자로서 예술이 현실의 진실을 증언할 수 있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그로츠의 사회의 기둥들은 정치·경제·언론 권력층을 비판한 풍자화

게오르게 그로츠(1893~1959)는 오토 딕스와 함께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의 양대 축이었다. 그는 현실을 기록하는 화가이자 부조리를 고발하는 풍자화가였다. 1893년 베를린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1912년 베를린 예술학교에 입학해 그림을 배우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광기와 비인간적인 군사주의를 목격한 그는 반(反)군국주의자로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화가의 임무는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는 붓을 칼처럼 휘둘렀고 마치 풍자 만평처럼 시대의 부패를 벗겨냈다.

사회 기둥들
사회 기둥들(그림 4)

베를린 국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회 기둥들(Die Stützen der Gesellschaft, 1926, 110x88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oo)은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4). 작품에는 정치인, 언론인, 성직자, 군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회의 기둥이라 불리지만 모두 타락한 위선자들로 묘사된다. 그림에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한 손에는 술잔을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 정치인, 민족주의라고 적힌 신문을 들고 있는 주정뱅이 언론인, 머리 위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부패한 성직자, 공허하고 위선적인 설교를 하는 또 다른 성직자, 흐리멍덩한 눈빛과 술 취한 듯한 군인이 그려져 있다. 그들의 얼굴은 인간이라기보다 괴물에 가깝다. 그로츠에게 이들은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아니라 사회를 좀먹는 기생충이었다. 사회 기둥들이라는 작품 제목은 냉소와 풍자로 그려낸 신즉물주의의 선언이었다.

다다이즘은 새로운 창조, 신즉물주의는 치유와 성찰의 예술

이렇게 다다이즘과 신즉물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 속에서 태어난 전후 미술의 두 얼굴이었다. 전자는 혼돈을 수용하며 기존 예술의 질서를 해체한 부정의 미학이었고 후자는 상처 난 현실을 냉정히 응시하며 인간의 존엄과 질서를 회복하려 한 재구성의 미학이었다. 서로 다른 길이었지만 다다이즘은 파괴를 통해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신즉물주의는 현실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치유와 성찰의 예술을 제시했다. 이 두 사조는 세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예술은 시대의 거울이자 성찰의 언어다. 전쟁과 혼돈의 시대에 다다는 조롱과 해체로, 신즉물주의는 풍자와 냉소로 현실을 직시했다. 둘째, 예술의 자유는 기존 질서의 틀을 깨려는 실험에서 비롯된다. 다다의 무정부적 정신은 초현실주의, 개념미술, 행위예술의 문을 여는 데 영향을 미쳤다. 셋째, 예술의 책임은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 신즉물주의는 냉정한 사실 묘사로 사회의 병든 양심을 드러내며 윤리적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예술의 시선은 외부의 세계에서 인간의 내면으로 향한다. 다다이즘의 부정과 신즉물주의의 냉정이 교차한 자리에서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탐구한 초현실주의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