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자유 국제질서는 정말 끝났나

2025-10-17 13:00:01 게재

80년 전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딛고 만들어진 자유 국제질서는 당시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 주도로 가능했다. 현실주의 관점은 세계정치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미국의 압도적인 힘으로 이 질서가 가능했다고 본다. 자유주의 관점은 패권국의 선택이 중요함을 인정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2차례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면서 힘이 아닌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의 이점을 깨닫게 된 인류의 집단 지성이라고 본다. 어느 관점이 더 옳은지에 대한 토론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답에 관계없이 규범과 다자주의 제도에 기반한 자유 국제질서는 지난 80년간 3차 세계 대전을 막고 평화의 기초 위에서 인류의 번영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 기여의 정도에 대한 평가는 자유주의와 현실주의 관점에 따라 갈릴 것이다.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해 온 국제질서가 21세기에 강대국 간 경쟁이 부활하면서 최근에는 그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다. 이 질서를 선택했던 패권국이 약화하는 힘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자유 질서의 근간인 다자주의에서 벗어나 일방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규범에서도 이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방주의로는 패권 회복 불가능

그렇다면 자유 질서는 끝난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첫째는 미국이 일방주의로 회귀하면 과거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론이다. 미국의 상대적인 힘이 하강하는 현상은 다양성과 혁신에 기반한 미국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데 기인한 것이지 다자주의에 기반한 자유 질서 때문이 아니다. 패권국 지위의 회복을 일방주의에서 찾으려는 처방은 잘못된 진단에 기초한 것이어서 성공할 수 없다.

둘째는 미국이 자유 질서에서 발을 빼면서 생기는 힘의 공백을 다른 국가 또는 복수의 국가들이 메워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패권국 지위를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세계 경찰의 역할을 대신 맡으려는 의지나 능력은 없어 보인다.

세계 경찰이 없어지면서 생기는 힘의 공백은 지정학 단층대에서 현상 변경을 추구하려는 국가 또는 비국가 행위자들의 모험주의 행동을 부추길 것이다. 이미 단층대가 활성화된 동유럽에서 코카서스 중동 서남아로 이어지는 불안정의 호(arc of instability)가 동·남중국해 대만해협 한반도로 이어진다면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이전의 전간기(戰間期)와 유사한 혼란상이 재연될 우려가 커질 것이다.

셋째는 기후·생태계 위기, 핵 겨울의 망령, 통제되지 않는 신기술의 위험 등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실존적 위협에 대한 대응이 개별 국가들의 각자도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이다. 인류 전체에 대한 실존적 위협에는 국경을 넘어서는 세계적 대응이 필수 조건인데 글로벌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합의의 형성을 주도해야 할 패권국이 발을 빼면서 생길 글로벌 리더십의 공백을 중국이나 다른 강대국들이 메울 의지나 능력이 역시 없다면, 그 결과로 초래될 인류 전체의 공멸은 시간 문제일 뿐 필연이 될 것이다.

위의 세 가지 현실주의 관점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자유 국제질서가 용도 폐기될 경우에 더 심각한 결과가 올 것임을 잘 보여주는 예시다. 현실주의 관점에서 보아도 자유 질서는 인류가 이미 실험했거나 상상해 볼 수 있는 어떤 다른 대안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거나 덜 나쁜 선택인 것이다.

세계정부가 없는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여전히 국가 주권이 세계질서의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작동할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자유 질서가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좋은 최선의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여전히 가장 덜 나쁜 차선의 선택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글로벌 위기 앞에 각자도생 답 아니다

지정학 지경학에 첨단 기술 경쟁까지 가속화되고 실존적 위협이 가중되는 혼돈의 시기에 대응 방안을 찾는 구심점이 되어야 할 다자주의 자유 질서가 흔들리는 것은 이중으로 심각한 문제다. 글로벌 컨센서스와 리더십의 공백이 확대되는 가운데 후퇴하는 자유 질서와 다자주의를 복원하는 것은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미국의 일방주의 경향은 앞으로 3년 반 트럼프 2기 동안 지속될 것이며 그 후의 향배도 불투명하다. 미국의 변화를 기다리면서 손 놓고 있을 여유는 없다. 자유 질서의 복원에 뜻을 같이하는 유사입장국들이 연대하여 나서야 한다. 이 연대는 의지와 능력을 공유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미국의 귀환을 유도해야 한다. 전후 자유 질서의 최대 수혜자인 한국은 이러한 연대의 최전선에 서야 한다.

김원수 경희대 미래문명원장 전 유엔 사무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