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산업의 딜레마…수급불안에 ‘수출 통제’ 카드 부상
"먼저 나프타 수출 동결 검토" … 경유·휘발유 등 연간 수출 479억달러 효자산업
국내 석유제품 소비 ‘산업용’ 64% 차지 … 원유 공급 차질시 산업 생태계 타격
미국과 이란 전쟁이 3주째로 접어들면서 한국 정유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원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산업 특성상 국제유가 급등과 공급차질이 현실화되면서 산업 생태계 변화가 우려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정유산업은 내수 소비뿐 아니라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를 갖고 있어 원유수급 불안이 발생할 경우 산업과 무역 모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조업의 혈관 ‘산업용 석유’ = 16일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석유제품 소비에서 산업용 비중은 63.5%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어 수송용이 31.6%이며, 가정·상업용과 발전용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
석유제품은 정유·화학·철강·항공 등 제조업 전반에서 원료와 에너지로 동시에 사용된다. 석유화학 산업에서 나프타 등의 원료수요가 크고, 제조업 공정에서 에너지 연료로도 사용되면서 산업부문의 석유 소비 비중이 높게 나타난 것으로 분석된다. 원유수급 불안이 발생할 경우 단순한 연료비 상승을 넘어 산업생산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한국 정유산업의 또 다른 특징은 높은 수출 의존도다. 국내 정유사들은 세계적인 정제능력을 바탕으로 아시아시장에 석유제품을 공급하는 구조를 구축해 왔다. 2024년 기준 한국의 석유제품 수출액은 약 479억달러(약 71조8000억원, 5억1420만배럴)에 달한다. 정유산업이 국내 제조업 가운데서도 중요한 수출산업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대형 정유사들은 대규모 정유시설을 기반으로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을 생산해 해외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제품별 수출 비중을 보면 경유가 39.8%로 가장 많고, 이어 휘발유 22.4%, 항공유 18.1%, 나프타 7.9%, 윤활유 4.7% 순이다.
수출 대상국을 보면 호주가 17.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일본 13.7%, 싱가포르 12.2%, 미국 9.6%, 중국 8.6%, 필리핀 7.5%, 베트남 5.1% 순으로 나타났다.
◆‘석유사업법 제19조’ 주목 = 경유 수출은 호주(5968만 배럴), 휘발유 수출은 싱가포르(2831만 배럴)가 최대 시장이다. 이들 국가는 자체 정제설비가 부족하거나 석유제품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로, 한국 정유사들이 안정적인 수출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원유공급 차질이 심화될 경우 한국정부가 국내수급 안정을 위해 석유제품 수출통제 카드까지 검토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유산업은 원유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큼 공급 충격이 발생하면 내수 확보가 우선 과제가 될 수 있다.
한국정부는 법적으로 석유제품 수출을 조정할 권한도 갖고 있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제19조에 따르면 산업통상부 장관은 석유수급 안정을 위해 생산·판매·수입·수출을 조정할 수 있다. 원유 공급 차질이나 국내 연료 부족이 발생할 경우 정부가 석유제품 수출 물량을 조정하거나 제한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는 셈이다.
실제로 안도걸 민주당 정책위원회 상임부의장은 16일 "석유화학업계가 현재 수급차질을 빚고 있어 생산을 감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며 "먼저 나프타의 경우 국내 생산물량의 해외수출을 전년 수준으로 동결하는 방안을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각국 정부가 연료 수출을 제한한 사례도 있다. 모스크바타임즈와 로이터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2023년 이후 국내 연료 부족을 이유로 휘발유 수출을 금지하고 경유 수출도 일부 제한했다.
중국은 2026년 3월 미국과 이란 전쟁으로 인한 잠재적인 국내 연료부족 사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3월부터 정제 연료 수출을 즉시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한국, 호주 수출이 18% 차지… 글로벌 공급망 연쇄 충격 = 한편 호주는 미국-이란 전쟁으로 우리나라와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호주는 품질과 안정적인 공급능력을 바탕으로 한국 등에서 석유제품을 대량 수입하고 있다”며 “미국-이란 전쟁으로 석유제품 수입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호주 기후변화에너지환경수자원부와 호주 석유연구소(AIP) 등에 따르면 2010년대 이후 정유소가 잇따라 폐쇄되면서 현재 운영 중인 정유시설은 2곳에 불과하다. 이로 인해 휘발유와 경유 항공유 등 주요 석유제품의 상당부분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구조가 형성됐다.
문제는 중동지역에서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이러한 공급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이란 간 충돌이 확대되면 국제 원유 공급망이 불안해지고 국제유가가 급등한다.
한국은 원유수입의 약 70%를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어 공급차질이 발생할 경우 국내 정유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한국정부가 석유제품 수출 통제를 시행할 경우 그 충격은 국내 정유업계뿐 아니라 주요 수입국에도 동시에 파급될 수 있다”며 “국내산업과 해외시장을 동시에 지탱하고 있는 한국 정유산업의 역할이 중동 지정학적 리스크 속에서 다시 시험대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jhlee@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