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신 5등급제, 변별력 논란은 기우다

2025-10-30 13:00:01 게재

고교 내신 평가 방식이 변화함에 따라 대학 입시에서 변별력 확보가 가능한지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들이 우려하는 목소리가 현장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증적 근거가 부족한 단순 추측에 불과하다. 내신 5등급제와 변별력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보다 쉽게 이를 이해할 수 있다.

변별력은 학년 오를수록 높아진다

고교 내신의 대입 변별력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누적된 성적으로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사교육 업체는 올해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성적만을 근거로 내신 5등급제의 변별력 저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다.

1학년 학생이 240명인 A고등학교의 사례를 보자. 1학년 때 모든 학생이 수강하는 공통과목의 1등급(상위 10%)은 24명이다. 그런데 2학년이 되어 학생들이 서로 다른 과목을 수강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본어’ 과목을 선택한 150명 중 15명, ‘기하’를 선택한 86명 중 9명, ‘물리학’을 선택한 87명 중 9명만이 1등급을 받는다. 과목별 수강 인원이 줄어들면서 1등급을 받는 학생 수도 자연히 감소하는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전 과목에서 1등급’을 받는 학생의 수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모든 과목에서 1등급을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 이전인 내신 9등급제에서는 진로선택과목 전체를 절대평가(성취도 3단계)만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현행 내신 5등급제에서는 일부 과목을 제외한 모든 선택과목에 상대평가도 적용하여 성취도와 ‘등급’을 병기한다. 선택과목 수강으로 1등급을 받을 수 있는 학생 수가 줄어들고 상대평가를 적용하는 과목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학년이 올라갈수록 변별력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전 과목에서 1등급을 받는 학생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진선미 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역의 고1 1학기 전 과목 1등급 비율은 1.72%에 불과하다. 이를 전국 고1 학생 수에 대입하면 전국의 전 과목 1등급 학생 수는 약 7300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이 수치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를 A고등학교의 사례에 적용해 보면 분명해진다. 1학년 때 전 과목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은 약 4명, 2학년이 되면 1~2명, 3학년이 되면 1명 이하로 감소하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내신 5등급제에서도 충분한 대입 변별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내신 5등급제로 대학 입시를 치르게 되는 2028학년도부터는 과목 선택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과목별 등급뿐만 아니라 학생이 어떠한 과목을 선택하여 수강했는지를 보여주는 학업 설계 내역도 입시 자료로써 활용되기 때문이다.

수시뿐만 아니라 정시에서도 과목 이수 이력을 반영하겠다는 대학이 8곳으로 늘었다. 무조건 내신에 유리한 과목만 골라 듣는 것은 수시(학생부 위주 전형)는 물론 정시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등급이 비슷한 학생들 간에는 결국 학생이 어떤 과목을 선택해 학습했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진로와 역량을 드러낼 수 있는 과목 선택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평가의 본질은 학생의 ‘학습’에 있다

사실 평가의 본질은 변별력이 아니다. 평가를 통해 학생이 교육과정의 성취기준에 맞는 학습을 했는지, 단순 암기가 아닌 창의적·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과도한 변별력 중심의 평가는 불필요한 경쟁을 양산하고 학생이 학업을 포기하도록 부추길 뿐이다.

이제 막 한 개 학기를 지나왔다. 일부 결과에 일희일비하며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진로에 맞는 과목을 선택해 깊이 있게 학습하는 것이 올바른 대입 전략이다. 올해 초 일부 사교육 업체는 고1 학생의 성적 비관으로 자퇴가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실제 고1 자퇴생은 오히려 전년 대비 감소했다. 사교육의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불안 마케팅에 휘둘리기보다 학교 수업에 충실히 참여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다.

권혁선 중등수석교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