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는 인간의 심리와 욕망을 시각화한 예술이었다

2025-10-30 14:53:43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꿈과 무의식을 현실 너머로 드러낸 미술 (20)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로 인문주의의 꽃을 피운 르네상스, 감정의 격정을 드러낸 바로크와 로코코, 이성과 이상을 추구한 신고전주의, 인간의 감성을 해방한 낭만주의, 현실을 직시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와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이제 ‘재현의 고전미술’은 ‘표현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다. 본 글은 이어서 모더니즘의 본 막으로 색채와 형태를 해방한 프랑스의 야수파와 입체파,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해방한 독일의 표현주의, 그리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 아르누보와 빈 분리파까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와 반성 속에서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가 등장하면서 모더니즘 미술은 더욱 심화되고 확장된다.

초현실주의(Surrealism)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까지 유럽에서 전개된 미술사조다. 불어로 Sur(너머의) + Réalisme(현실주의) 에서 유래한 말로 현실 너머의 예술을 의미한다. 즉,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 너머로 드러낸 미술이었다. 이 용어는 1917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초현실적 희곡’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1924년 프랑스 문학가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예술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의학도를 꿈꾸었던 브르통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아 인간의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예술 창조의 원천으로 본 것이다. 이후 초현실주의는 회화뿐만 아니라 문학, 사진, 영화, 디자인 등 다양한 예술 영역으로 확산하면서 20세기 예술의 시야를 획기적으로 확장시켰다.

이렇게 초현실주의 미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리와 억압된 욕망을 시각화한 예술이었다. 그림은 기괴하고 낯설며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무의식의 논리로 재구성된 또 하나의 현실, 곧 초(超)현실이었다. 이성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문 시각 혁명이자 인간 내면의 진실에 대한 탐색이었으며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이성이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예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미술이 다다이즘이었다면 초현실주의는 전쟁의 반성 위에서 정신의 풍경을 그려낸 미술이었다.

초현실주의는 회화, 사진,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꿈과 무의식 세계를 시각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인간의 이성과 문명에 대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렇기에 예술은 다다이즘의 반(反)예술 정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이성이 붕괴한 시대에 진실이 무엇인가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24년 브르통이 발표한 ‘초현실주의 선언’은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였다. 그는 다다이즘의 파괴성과 무의미에 한계를 느끼고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자동기술법을 창작의 원리로 제시했다. 이는 이성의 규율을 해체하고 꿈과 현실의 경계 위에서 탄생한 새로운 예술의 문법이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1931)’에서 녹아내리는 시계를 통해 시간과 존재의 불안정성을 형상화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배반(1929)’에서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덧붙이며 현실과 이미지의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조안 미로는 점, 선, 기호가 어우러진 화면을 통해 무의식의 언어를 시각화했고 막스 에른스트는 데칼코마니와 프로타주 같은 실험적 기법으로 우연과 환상의 세계를 창조했다. 이 모두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 존재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시도였다. 초현실주의는 그렇게 현실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자 억압된 인간 정신의 진실을 드러내는 예술의 통로가 되었다. 이는 초현실주의 미술의 특징이자 감상의 포인트가 된다.

달리, 마그리트, 미로 미술관은 초현실주의 3대 거장의 전용 미술관

필자는 지난해 6월 4일부터 8일간은 마드리드의 소피아 미술관, 바르셀로나의 호안 미로 미술관, 피게레스의 달리 미술관,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이어 6월 12일부터 15일간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 달리 미술관 등을, 7월 19일부터 21일간은 빈의 프로이트 박물관 등을, 8월 3일부터 5일간은 브뤼셀의 마그리트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초현실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초현실주의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예술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렇기에 작품들은 여러 나라의 미술관에 분산되어 있었다. 특히 초현실주의 회화는 3대 거장인 달리, 미로, 마그리트가 한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한 인연으로 이들의 주요 작품은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의 미술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그들의 전용 미술관은 이번 여행에서 필자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달리 미술관은 마치 광기와 상상이 교차하는 연극 무대 같았고 마그리트 미술관은 현실에 질문을 던지는 철학 실험실 같았으며 미로 미술관은 별과 달, 태양 등의 기호가 뒤섞인 유희의 공간 같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초현실주의 작품은 제한적이었지만 외관에 설치된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대한 거미 조각(9m)인 ‘마망(Maman, 엄마)’은 현대적 초현실주의 조각처럼 다가왔다. 한편, 빈의 프로이트 박물관은 그가 47년간 거주하며 진료했던 집으로 ‘꿈의 해석’이 쓰인 책상, 진료 기록이 담긴 편지, 당시의 신문과 진료소 소파 등이 그대로 남아있어 정신분석학의 성지에 온 듯한 감정이 들었다.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 없이 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꿈, 무의식, 욕망, 리비도 개념은 브르통과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철학적 토대를 제공하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결국 초현실주의는 장소의 운동이라기보다 의식의 연결로 이루어진 예술적 연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시간의 상대성과 기억의 불안정성을 표현한 걸작

이제 초현실주의 명작들을 살펴본다. 달리, 미로, 마그리트 외 막스 에른스트, 프란시스 피카비아, 만 레이, 조르조 데 키리코, 이브 탕기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대가들이다. 이들은 자동기술법, 데페이즈망, 편집광적 기법,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콜라주, 트롱프뢰유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화했다. 스페인 출신인 달리와 미로, 벨기에 출신인 마그리트의 출생순서는 미로(1893)-마그리트(1898)-달리(1904)지만 사망순서는 마그리트(69세)- 미로(90세)- 달리(84세)다. 3인 모두 한때 파리에서 활동하였으나 함께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 살바도르 달리(1904~1989)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인 화가였다.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피게레스에서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달리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상상력과 예술적 기질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달리는 17세 때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기이한 행동과 강한 개성으로 교수들과 갈등을 빚어 퇴학당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미 교육보다는 자신의 상상력과 무의식의 세계를 더 신뢰했고 곧 스페인과 파리를 오가며 새로운 예술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된다. 1920년대 후반에 달리는 앙드레 브르통이 주도한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했으나 단순히 무의식을 자동적으로 표현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이 매료되며 “편집증적-비판적 방법”이라는 독자적 창작 기법을 제시한다. 이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떠오른 착각과 환상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여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환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기억의 지속
기억의 지속(그림 1)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 24x33cm, 유채, 출처: www.moma.org)은 달리의 대표작이다(그림 1). 필자가 과거에 미국 근무 시 본 적이 있고 유럽에 있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초현실주의를 상징하는 그림이기에 소개한다. 달리가 고향 카탈루냐의 황량한 해안을 배경으로 녹아내리는 시계를 통해 시간의 상대성과 기억의 불안정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적이고 쓸쓸한 바닷가의 나무, 돌, 기이한 형체 위에 녹아내리는 시계는 무의식의 시간을, 엎어진 시계에 들러붙은 개미는 부패와 죽음을 암시한다. 체다 치즈가 접시에 녹아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그날 밤에 그림을 완성했다는 일화는 달리의 남다른 상상력과 직관을 보여준다. 이후 소위 ‘녹는 시계’는 초현실주의의 상징이자 달리의 시그니처 이미지가 되었다. “나는 마약을 하지 않는다, 나는 마약 그 자체다”라는 그의 말은 달리 자신이 곧 초현실주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은 보이는 것이 곧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걸작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프랑스 중심의 초현실주의 속에서 자신만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한 거장이다. 브뤼셀의 로열 광장 옆 왕립미술관 내 마그리트 전용 미술관은 벨기에 내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 미술관은 회화뿐만 아니라 드로잉, 사진, 편지 등 230여 점 이상이 전시되어 있어 마그리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벨기에 남부의 레신에서 태어난 마그리트는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14세 때 어머니가 강물에 투신자살한 사건으로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잔상을 남겼다. 1916년 브뤼셀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아카데미 교육에 실망하여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 이후 그래픽 디자이너로 생계를 이어가며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에 큰 영향을 받아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1927년 그는 파리에서 브르통 주도의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하지만 3년 만에 이탈했다. 이후 그는 브뤼셀로 돌아가 독립적이고 철학적인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보다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을 낯선 방식으로 결합해 충격을 주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주로 활용했다. 그가 남긴 피레네의 성, 빛의 제국, 이미지의 배반, 사람의 아들 등은 이러한 기법과 정신을 응축한 명작들이다.

이미지의 배반
이미지의 배반(그림 2)

브뤼셀의 마그리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미지의 배반’(The Treachery of Images, 1929, 63x94cm, 유채, 출처: www.fine-arts-museum.be)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2).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곁들인 그림은 보이는 것이 곧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정면으로 선언한다. 단순한 시각적 유희를 넘어 보는 것과 믿는 것의 간극, 실재와 이미지의 철학적 단절을 묻는 것이었다. 브뤼셀에서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그림이 거짓말을 한다”라는 논란이 일었다. “분명 파이프인데 왜 아니라고 하느냐”는 항의에 마그리트는 “그렇다면, 이 파이프로 담배를 피워보시오”라고 말했다. 이미지와 실재는 다르다는 점을 유머와 논리로 재치 있게 응수한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개념미술과 팝 아트를 넘어 철학, 문학, 광고, 영화, 디자인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린다”라는 그의 말은 바로 초현실주의 정신이었다. 사후 그의 그림은 철학적으로 재조명되었고 그는 ‘철학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게 되었다.

미로의 ‘경작된 밭’은 현실과 무의식이 중첩된 세계를 시각화한 걸작

호안 미로(1893~1983)는 피카소, 달리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한 명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보석 세공사인 아버지와 목공예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로는 14세 때 미술학교에서 상업미술을 배웠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건강 문제로 농촌에서 요양하게 된다. 그 시기에 미로는 자연과 색채, 별과 상징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키우게 되었다. 1919년 파리로 건너간 미로는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앙드레 브르통이 이끄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하면서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간다. 그는 무의식과 본능을 풀어내는 자동기술법을 실험하면서도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단순한 선과 점, 색면 속에 우주적 질서와 생명의 기원을 담아내는 독창적인 양식을 구축했다.

경작된 밭
경작된 밭(그림 3)

경작된 밭’(The Tilled Field, 1923–1924, 66×92.7 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pedia)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3). 미로가 고향 농가의 밭과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다양한 상징적 요소를 병치하고 변형한 작품이다. 하늘, 들판, 집이라는 3단 구도 속에 인간과 동물, 식물, 현대적 기호가 뒤섞여 있다. 나무 위에는 눈과 귀가 달려있고 신문·깃발·기계 장치 등은 자연과 문화, 상징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단순한 풍경화를 넘어 현실과 무의식이 중첩된 세계를 시각화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1930~1940년대 나치 집권 시기에 MoMA, 구겐하임, 휘트니 등 미국 미술관들이 집중적으로 수집에 나서면서 미국의 컬렉터들에 의해 유입되어 구겐하임이 소장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미로 미술관은 드로잉, 회화, 조각 등 1400여 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된 전용 미술관이다. “나는 잘 때가 아니라, 깨어있을 때 꿈을 꾼다(I never dream when I sleep, Only when I awake)”는 그의 말처럼 미술관은 미로의 상상력이 살아 숨 쉬는 놀이터 같았다. 다만 몬주익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전시가 주로 후기작이라 초현실주의 대표작은 거의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초현실주의는 이성과 무의식,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문 시각 혁명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폐허 속에서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펼쳐 보인 미술이었다. 다다이즘의 반(反)예술 정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심연을 응시한 정신의 미학이었으며 동시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성과 무의식,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문 시각 혁명이었다. 그렇게 초현실주의는 회화를 넘어 사진, 영화 등 시각예술 분야에서 폭발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초현실주의는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예술의 중심을 외부 현실에서 내면의 무의식으로 옮겼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예술의 새로운 감수성과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 기법의 해방을 통해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었다. 자동기술법, 데페이즈망, 데칼코마니, 편집광적 기법 등은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창작의 자유를 실현하며 이후 추상표현주의, 개념미술,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셋째, 예술은 인간 존재의 심층을 탐구하는 실존적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달리, 마그리트, 미로 등은 회화 속에서 현실을 기묘하게 비틀며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는 시각예술이 무의식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제 미술은 순수한 색과 형태, 질서의 조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본질을 탐구하는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