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혜현의 중남미 톺아보기
갈림길 선 아르헨티나, 조건부 승인과 미국의 압력
지난 10월 26일 치러진 아르헨티나 의회 중간선거는 단순한 국내 권력구도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표면적으로는 집권세력의 예상 밖 승리가 두드러지지만 그 이면에는 국내 정치의 동요, 국제금융의 압력, 그리고 미중간 지정학적 경쟁이 교차하는 현실이 놓여있다.
무엇보다 국내정치적 차원에서 이번 승리는 밀레이정부의 급진개혁이 국민적 동의를 받고 있는지 확인하는 중대한 시험대였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집권당인 자유전진당(LLA)이 전국 득표율 41%로 페론주의 야당에 크게 승리했다.
불과 한달 전만 해도 집권당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州) 의회 선거에서 참패해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 동생을 둘러싼 부패 스캔들이 정부의 정당성을 뒤흔들었고, 폭등하는 인플레이션과 페소화 폭락은 정부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켰다. 여당의 패배는 기정사실로 보였고 여론조사 역시 부정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중간선거 결과는 완전히 뒤집혔다. 집권당은 전국 득표율 41%를 기록하며 의석을 늘렸고, 대통령 거부권이 의회에서 무력화될 가능성마저 한층 낮췄다.
대안 부재가 만든 ‘조건부 선택’
이러한 반전의 배경에는 기존 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피로감과 냉소가 자리한다. 수십년 동안 정치권을 지배해 온 페로니즘 진영에 대한 불신, 반복된 부패와 비효율에 대한 실망이 임계점을 넘었다. 유권자들은 안정적 대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기존 정치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며 급진적 변화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번 승리를 정부가 주장하는 개혁에 대한 지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최근 중간선거 중 가장 낮은 투표율(67%대)은 정치적 무력감과 사회적 피로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번 결과는 여당의 역량이 빚어낸 승리라기보다 마땅한 대안부재가 만든 ‘조건부 선택’이었다. 밀레이정부가 선거 승리를 기반으로 개혁의 속도를 더욱 높이려 한다면 이러한 민심의 복잡한 층위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상황 역시 개혁의 명암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밀레이정부의 과감한 정부 축소, 규제 철폐, 복지 삭감 정책은 일부 재정지표를 개선하고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사회 전체로 퍼지기 전에 고통이 먼저 나타났다. 실업 증가, 공공요금 인상, 복지 축소는 취약계층을 직격하며 사회적 긴장을 키웠다.
경제안정의 조짐이 체감되기 전에 개혁의 비용이 먼저 쏟아지는 구조에서는 사회적 불만이 폭발할 위험이 상존한다. 정부는 개혁의 속도와 사회적 충격 완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할 경우 정치적 역풍에 직면할 수 있다.
야당의 부진은 이번 선거 결과를 규정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집권 세력의 승리가 이변으로 평가되는 만큼 야당의 무능은 그 자체로 정치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에서 누가 더 나은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누구를 더 신뢰할 수 없는가를 먼저 판단했다.
오랜 기간 국가 운영을 주도해 온 페론주의 진영은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反) 밀레이’라는 단조로운 구호 외에는 고물가 빈곤확산 실업증가에 대응할 현실적 해법은 보이지 않았고, 복잡한 위기를 직시하는 비전도 부재했다. 계파 갈등과 리더십 부재로 야당의 내부 분열은 더욱 심각했다. 따라서 정치적 피로감은 곧 냉소로 이어졌고, 이는 여당의 반사적 득표로 연결되었다.
야당의 정책 부재와 신뢰 상실은 이번 선거에서 인상적인 역설을 만들어냈다. 여당의 개혁은 고통을 수반했고 사회적 혼란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기존 정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선택을 했다. 이는 여당에 대한 긍정적 지지라기보다 야당의 정책 부재와 신뢰 상실에 대한 징벌적 심판이었다.
민주주의는 유능한 여당만큼이나 견제와 균형을 책임질 건강한 야당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그 균형의 한축이 무너져가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유능한 야당의 부재가 향후 정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일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개혁 과정에서 정부와 의회, 사법부의 충돌이 반복되고 언론·시민 사회에 대한 압박이 강화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조짐이다.
트럼프의 전폭적인 밀레이 지지 한몫
외교·지정학적 환경 역시 이번 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밀레이정부에게 유리한 외부환경을 조성해주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직전 200억달러 통화 스와프와 추가 200억 달러 지원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약속하며 밀레이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트럼프는 “밀레이가 이번 선거에서 패한다면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는 발언까지 하면서 노골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보냈다. 이는 불안정한 환율과 금융시장을 일시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를 냈다. 미국이 제공하는 금융지원 채무조정 가능성에 대한 신호, 달러화 스와프 협력 등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안전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외교적 안정성은 내부 경제적 불안 속에서 국내 유권자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며 여당에게는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미국발 금융지원은 단순한 외교협력 수준을 넘어 이번 선거의 결과를 좌우한 구조적 요소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안정은 아르헨티나가 경제적 주권과 외교적 자율성 사이에서 점점 좁은 선택지를 강요받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외교적 요인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 역시 지난 20년간 아르헨티나의 인프라, 광물 자원, 농업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다. 중국의 영향력은 단순한 경제적 파트너십을 넘어 아르헨티나의 대외전략에 강력한 변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밀레이정부의 친미적 전환은 중국과의 관계에 균열을 만들었고 이는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아르헨티나를 선택의 기로에 세웠다. 이번 선거는 아르헨티나가 지정학적 경쟁구도 속에서 명확한 방향성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중국의 관점에서 아르헨티나의 이번 정치 변화는 향후 대규모 투자와 전략적 접근법에 대한 조정 가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중간선거 승리는 밀레이정부에 힘을 실어준 국민의 ‘조건부 승인’이다. 이번 승리는 기존 야권의 무기력과 분열, 페로니즘 진영의 쇠퇴가 빚은 반사적 승리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밀레이정부의 실제 정책집행 능력은 여전히 시험대 위에 있다.
의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점은 개혁 추진의 장애물이 일부 제거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회 과반을 넘지 못한 현실에서 여당의 개혁안은 끊임없이 수정과 조율을 요구받을 것이고, 급진적 개혁노선은 또다시 사회적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경제위기의 본질적 해결 없이 정치적 승리만으로는 장기적 통치 기반을 확보하기 어렵다.
경제회복과 사회안정 이중과제 해결해야
중간선거 결과를 두고 밀레이정부의 개혁 성과가 입증되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민들이 변화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번 승리로 개혁의 명분은 강화됐다. 그리고 그 개혁이 민주주의적 절차와 사회적 합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는 과제 역시 한층 무거워졌다. 또한 이번 선택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정치의 변수들이 기묘하게 결합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제 밀레이정부는 경제회복과 사회안정이라는 이중과제를 해결해야 하며 동시에 미중경쟁 속에서 국가의 외교적 자율성을 유지해야 하는 난제를 풀어야 한다. 이번 선거는 승리가 아니라 출발점이다. 진정한 시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