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는 사유와 형식의 조형 언어였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감정의 추상과 이성의 조형, 두 축의 미학 (21)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이 글은 먼저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흐름, 즉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에 이어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와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재현중심의 고전미술은 표현중심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이제 서양미술은 모더니즘의 본 막으로 들어섰다.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아르누보, 빈 분리파 미술에 이어 나타난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와 반성 속에서 태동한 예술의 응답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사이는 예술의 본질, 형식, 목적에 대한 총체적 전환과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제 재현을 거부하고 형식의 질서, 정신의 리듬을 추구한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를 살펴본다.
추상미술(Abstraction)과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프랑스를 비롯해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미술사조다. 신조형주의는 1917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몬드리안이 사망한 1944년까지 이어졌으나 일반적으로는 1931년경까지를 전성기로 본다. 이 두 사조를 함께 살펴보는 이유는 시기적으로 중첩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미술이 모두 재현적 회화의 전통을 거부하고 감성의 추상과 이성의 조형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탐구한 순수미술이었기 때문이다.
추상미술이 사물의 본질을 순수한 형태·색·선·질감 등 조형 요소 자체로 표현하는 미술이었다면 신조형주의는 수직·수평선, 3원색(빨강, 파랑, 노랑), 3무채색(흰색, 검정, 회색)의 비대칭적 조화로 우주의 질서와 보편적 균형을 시각화한 미술이었다. 당시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의 파격적이며 실험적인 그림 앞에선 대중의 반응은 낯설었다. 아니 황당했다. “우리 아이도 이 정도는 그리겠다.”, “선을 몇 개 긋고 색을 칠한 것뿐인데 이게 왜 명작이냐?” 등 당혹감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사유하고 사유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는 단지 새로운 표현방식이 아니라 예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자체를 바꾼 혁신이었다. 이렇게 두 사조는 미술에 대한 대중의 고정관념을 뒤흔들며 사유의 확장과 형식의 해방을 통해 모더니즘을 더욱 심화시키고 확장했다.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는 예술을 사유의 언어로 확장한 시각 혁명
20세기 초 유럽은 산업혁명에 따른 과학기술의 진보로 물질적 풍요를 누렸지만 정신적 공허감은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은 예술가들에게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들은 예술만이 인간 정신의 순수성과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추상미술은 칸딘스키의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910년경 자연의 형태를 제거한 세계 최초의 추상 수채화 ‘무제’를 그렸다. 어느 날 우연히 작업실에 거꾸로 세워진 자신의 그림을 보고 “형태가 아닌 색과 선 자체가 내면의 진동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는 추상미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이후 칸딘스키는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1)’를 통해 “예술의 목적은 재현이 아니라 영혼의 진동을 시각화”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사유는 클레, 들로네, 말레비치 등으로 이어지며 추상미술을 감정·상징·정신의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신조형주의도 몬드리안의 사유와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세잔의 구조적 회화와 큐비즘의 분해적 시각에 영향을 받았으며 1911년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을 본 뒤 자연의 형상을 기하학적 구조로 환원했다. 1917년 동료 되스부르흐와 함께 시작한 ‘데 스틸(De Stijl) 운동’은 신조형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칸딘스키, 클레는 기호적이고 구조적이지만 색채와 감성이 섬세한 따뜻한 추상을 추구했으며 몬드리안, 말레비치는 감정보다는 개념이 우위인 차가운 추상을 지향했다.
칸딘스키, 클레는 따뜻한 추상, 몬드리안, 말레비치는 차가운 추상을 지향
필자는 지난해 7월 29일부터 30일간은 스위스의 바젤미술관, 베른의 파울 클레 미술관, 베른미술관 등을, 8월 6일부터 9일간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시립미술관,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의 덴하흐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두 미술은 구상화가 아닌 추상화이기에 감각과 철학을 체험하는 여정으로 다가왔다. 특히 차가운 추상과 따뜻한 추상을 드러내는 작품들은 정서적 온도, 표현방식, 철학적 태도가 달라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데 몰입이 필요했다.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구상화와 달리 작품 속에 해석을 위한 단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보는 미술이 아니라 읽는 미술에 가까운 감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현대미술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추상미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독자분들의 혼동을 피하고자 추상미술-추상표현주의-신표현주의의 차이점을 잠깐 짚어본다. 추상표현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면서 1940~1950년대에 등장한 미술이다.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드 쿠닝 등이 대표적인 화가로 그들은 실존적 불안과 개인의 자유를 거친 붓질, 색면, 액션페인팅으로 표출했다. 신표현주의는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1970~1980년대에 등장한 미술이다.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장 미셀 바스키아 등이 대표적인 화가로 그들은 강렬한 색채, 원초적 붓질로 회화의 서사성을 복원했다. 칸딘스키의 추상미술은 이러한 흐름의 진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예술이론과 회화는 추상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의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회화가 단순한 재현을 넘어 존재, 감정, 철학의 언어로 확장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칸딘스키의 ‘구성 8’은 내면의 세계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추상미술의 정수
이제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 명작들을 살펴본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클레, 몬드리안은 이 두 사조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그중 칸딘스키(1866~1944)는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오늘날 독일과 러시아 양국에서 동시에 기념되는 20세기 회화의 거장이다. 그의 생애와 초기활동은 표현주의 미술(16편)에서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추상미술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본다. 그는 모스크바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였으나 독학과 실험을 통해 추상회화를 개척한 화가다. 1911년 뮌헨에서는 청기사파를 결성해 독일 표현주의를 이끌었으며 그 후 예술·디자인·건축 종합학교인 바우하우스(1919~1933,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에서는 교수로 재직하며 색채이론과 조형예술의 실험에 큰 업적을 남겼다.
‘구성 8’(Composition VIII, 1923, 140 × 201 cm, 출처: Wikimedia Commons)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1). 작품은 바우하우스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그린 ‘Composition’ 연작 중의 하나로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한 추상회화의 정수다. 작품 속의 원, 반원, 삼각형, 직선, 격자 패턴은 서로 겹치고 충돌하면서 시각적 리듬과 긴장을 만들어낸다. 칸딘스키는 원을 “가장 큰 대립을 결합하는 형태”로 보았으며 이는 우주의 조화와 영혼의 울림을 상징하는 기호였다. 어떠한 특정한 대상을 묘사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형식의 리듬, 질서와 혼돈의 긴장, 감성과 이성의 대립이 음악처럼 구성돼 있다. 칸딘스키는 평생 음악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화가였다. 그는 “회화는 음악처럼 구성(Composition)되어야 한다”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이를 구현한 시각적 악보였으며 내면의 세계를 작곡한 예술이었다.
말레비치의 ‘모스크바의 영국인’은 의미의 부조리를 시각화한 절대주의 명작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는 러시아 절대주의(Suprematism)의 창시자이며 형태의 근본을 해체하고 회화를 개념으로 이끈 20세기 추상미술의 혁신가였다. 폴란드계 우크라이나 가정에서 태어난 말레비치는 키예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초기에는 후기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등 다양한 유럽 미술 양식을 수용하며 실험을 이어갔으나 1913년 무렵부터는 사물의 재현에서 벗어나 순수한 형태와 색의 본질로 향했다. 그 결실이 1915년 발표한 ‘검은 사각형’이다. 검은 정사각형 하나가 흰 바탕 위에 떠 있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말레비치는 이를 통해 회화에서 대상, 원근, 질감, 명암, 구도라는 전통적 요소를 과감히 제거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무의 공간을 의식의 출발점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절대주의의 양식적 실험이 아니라 철학적·우주론적 사유에 기반한 예술의 혁명이었다.
‘모스크바의 영국인’(An Englishman in Moscow, 1914, 106×68.5cm, 출처: Wikimedia Commons)은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말레비치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2). 작품은 입체주의, 미래파, 러시아 정교 아이콘의 기호들을 조합하면서 재구성한 것이다. 화면 속의 신발, 십자가, 텍스트 조각, 상징적 이미지들은 파편화된 상징들로 의미의 부조리를 나타낸다. 말레비치가 왜 영국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중심에 세웠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양식의 실험을 넘어 언어기호·의식의 구조를 해체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의 미술은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몬드리안의 ‘구성’은 자연의 형상을 기하학적 구조로 환원한 명작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은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고흐를 잇는 네덜란드 회화의 거장이며 신조형주의 미술의 창시자다. 왜 신조형주의인가? 이는 몬드리안이 ‘신조형주의에 대하여, 1917)’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새로운 형태의 예술(New Plastic Art)을 의미한다. 기존의 조형주의가 전통적인 형태 중심의 예술이라면 신조형주의는 그 형태를 정신적·보편적 질서의 상징으로 확장한 것이다.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 출신인 몬드리안은 엄격한 칼뱅주의 교사인 아버지 아래서 성장했다. 암스테르담 미술학교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후 초기에는 전통 풍경화, 인상주의풍의 그림을 그렸으나 세잔의 구조적 회화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 작품을 접한 후부터는 자연의 형상을 기하학적 구조로 환원하기 시작했다.
‘구성-큰 붉은 면과 노랑, 검정, 회색, 파랑’(Composition with Large Red Plane, Yellow, Black, Gray and Blue, 1935~1942, 69.2 × 72.7 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media Commons)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3). 작품은 굵고 검은 수직·수평선으로 화면을 나누고 크고 붉은 면은 시각적 중심에 노랑·검정·회색·파랑의 색면은 그 주변에 질서 정연하게 배치했다. 수학적 균형 위에 설계된 정제된 구도, 색채의 강도, 면적의 차이는 시각적 긴장감과 안정감을 절묘하게 조율하고 있다. 몬드리안은 뉴욕 맨해튼의 격자구조 거리와 재즈 클럽의 흐르는 리듬에서 영감을 받고 벽에 색종이 조각을 수십 차례 바꿔가며 색과 면적의 배열을 실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MoMA가 주최한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은 “전시장에 잘못 들어왔나? 페인트 작업 중인 방인 줄 알았다”라고 말하면서 직원에게 항의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전해진다. 세상은 그것이 그림인지를 의심했지만 몬드리안은 그것을 구성된 사유라고 믿은 조형 철학자였다.
클레의 ‘파르나소스를 향하여’는 내면의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명작
파울 클레(1879~1940)는 시적 상상력과 기호적 감각으로 20세기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힌 대가다. 스위스 베른 근교에서 태어난 클레는 독일 국적의 음악가 부모 아래서 성장했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그는 한때 음악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미술에 매료되어 뮌헨 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를 배운 후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클레는 표현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와도 접점을 갖지만 “나는 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렸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내면의 감정을 시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파르나소스를 향하여’(Ad Parnassum, 1932, 100×126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media Commons)는 베른의 파울 클레 미술관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4). 파르나소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과 시의 신인 아폴론과 뮤즈들이 거주하는 산을 가리킨다. 화면 속 커다란 삼각형은 이집트 피라미드, 그리스 신전, 혹은 예술의 산 파르나소스를 상징한다. 삼각형 내외부에 수천 개의 작은 사각형들은 음악적 화음을 암시한다. 작품의 제목은 단순한 장소명이 아니라 예술가의 이상과 정신적 여정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울이 나치의 예술 탄압으로 바우하우스의 해체 조짐이 있을 때 그린 것으로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라는 그의 신념을 담아낸 걸작이다.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는 조형 언어를 해방한 20세기 미술의 전환점
이처럼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는 전쟁과 문명의 위기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대답이었다.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넘어 형태와 색채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닌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자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추상미술이었으며 신조형주의는 추상미술을 가장 순수한 조형의 단계로 끌어올린 철학적 실험이었다. 이렇게 두 사조는 조형 언어의 지평을 확장하면서 20세기 미술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여기서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는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예술의 중심을 외부 세계의 재현에서 내면의 구조와 질서로 옮겨왔다. 둘째, 조형 언어의 해방을 통해 회화의 가능성을 근본부터 재정의했다. 이는 훗날 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현대미술의 기틀을 마련했다. 셋째, 예술은 감정과 이성, 질서와 혼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탐색하는 형식의 철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두 사조는 미술의 본질을 색, 형식, 사유로 다시 쓰며 20세기 미술의 지평을 새롭게 열었다. 그러나 미술은 다시 감정과 서사의 온기로 회귀한다. 전후 파리에서는 국적과 언어를 넘어 인간의 본질을 회화에 되묻는 새로운 흐름으로 ‘에콜 드 파리’가 꽃을 피우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