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AI 시대 노동자 보호

독일, AI 자율결정 감시·감독하는 ‘공동결정 4.0’

2025-11-14 13:00:30 게재

사람 개입해 투명성 책임성 공정성 윤리성 보완 … 사업장평의회법 개정으로 파견·단시간 근로자도 보호

노동의 존엄이 인정되지 않았던 과거, 노동자들은 자신이 노동자로 인식되는 것을 꺼렸다. 자녀에게 노동자라는 이름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땀을 흘려 일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는가? 이런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인공지능(AI) 시대가 오고 있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ennth)는 AI에 의해 다시금 빼앗길 노동의 존엄을 ‘인정투쟁’ 이론으로 경고한다.

독일과 유럽연합(EU)은 지금 AI 시대의 새로운 노동규칙을 만들기에 바쁘다. 산업재해 4.0, 평의회와 공동결정 4.0강화, 재택근로법, 연방차별금지청의 권고와 일반평등대우법, 유럽인공지능법 등 법제 정비에 나섰다. 이들은 AI에 의한 인간 노동의 대체를 일자리 상실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위기를 넘어 ‘노동의 존엄성 훼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위기라고 여긴다. 독일 사례 연구, 한국 사회 맞춤형으로 정책을 개발하는 독일정치경제연구소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해 연구진과 연구네트워크들이 독일과 EU의 법제 정비는 어디까지 왔는지 살폈다.

독일 폭스바겐 사업장평의회는 총회에서 공동결정 4.0의 추진에 대해 설명한다. 공동결정제는 성공적인 독일 모델이다. 그러나 성공을 지키려면 변화하는 노동의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 출처: www.manager-magazin.de
알고리즘의 말을 잘 들으면 떡 하나 더 얻어먹는 시대가 열렸다. 알고리즘이 배정한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면 더 좋은 일이 주어지고 이를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는다. 인공지능(AI)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단번에 분석해 의사결정을 내린다. 데이터 기반의 객관적 판단으로 주관성을 배제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AI의 불공정성과 마주한다. 예컨대 채용 프로그램이 성차별적 편견이 담긴 데이터를 학습해 여성을 차별한 사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잘못된 센서 데이터를 해석한 로봇팔이 작업자를 다치게 했을 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인공지능인가, 센서 제조사인가, AI 개발자인가, 아니면 공장 관리자일까?

AI가 자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는 투명성 책임성 공정성 윤리성을 보완할 사람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독일은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사람의 공동결정을 통해 인공지능의 자율결정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공동결정 4.0’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정부, 알고리즘 대응 플랫폼 구성 = 공동결정 4.0은 디지털 시대의 노동 보호를 위해 독일에서 2013년부터 구상됐다. 독일 연방정부 경제기후보호부는 4차산업혁명(인더스트리 4.0) 전략을 중장기적으로 수립하고 디지털화를 그 실현을 위한 핵심과제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민관이 함께 참여하는 ‘플랫폼 인더스트리 4.0’을 설립했다. 이 플랫폼은 경제기후보호부를 중심으로 산업계 학계 연구기관 노동조합 등 약 150개 기관이 참여하는 디지털 전환의 핵심 추진 조직으로 ‘공동결정의 현대화’를 주요 의제로 삼고 있다.

2015년 독일 금속노조를 포함한 여러 노조들은 플랫폼에 참여하는 연구기관들과 함께 디지털화에 대응하는 공동결정제도의 재정립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고 이를 ‘공동결정 4.0’이라 명명했다. 연구개발 분야에는 알고리즘 기반 의사결정, 개인정보 보호 및 디지털 감시, 하이브리드 근무 형태(재택근무·플랫폼 노동), AI 관련 사업장 협약, 사업장평의회 구성원을 위한 행동지침과 표준협약서,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이 포함됐다.

◆사업장평의회, 디지털 회의와 의결 = 이러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독일 정부와 의회는 2021년 사업장평의회법 제30·33조를 개정했다. 노동자는 공동결정제도를 통해 기업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사업장평의회는 그 영향력을 보장하는 핵심 기구로 작용한다. 1976년 공동결정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물리적 사업장과 대면 회의를 전제로 설계됐다. 그러나 2021년 사업장평의회법 개정을 통해 사업장평의회 회의를 온라인으로 개최할 수 있게 됐고 의결 또한 전자투표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법 개정을 통해 파견근로자와 단시간 근로자 등 비정형 고용형태의 근로자도 사업장평의회의 보호 대상에 포함됐다. 이어 2023년에는 사업장평의회의 회의록과 의결서를 디지털 문서로 작성·보관할 수 있도록 했으며 온라인 회의의 보안 요건과 본인 확인절차를 구체화했다. 또한 기업과 사업장평의회 간 협의 절차에서 비대면 방식의 적용 범위가 확대됐다.

◆단체협약에 AI 감시 감독권 = 2021년 연방노동사회부는 ‘노동 4.0–공동결정 참여주체를 위한 행동지침’을 발행했다. 이 지침서는 독일노총의 협력 재단인 한스뵈클러재단이 그간 체결된 사업장평의회 협약 및 단체협약 사례를 분석해 개발한 것이다. 그 하나로 독일 금속노조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역량센터, 대표적인 응용과학 연구기관인 프라운호퍼 협회, 한스뵈클러 재단, 그리고 여러 공과대학과 함께 ‘AI 관련 사업장 협약’의 예시를 공동 개발했다.

예시 협약서에는 먼저, 사용자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목적, 기능, 데이터 처리 방식 및 의사결정 구조에 대해 사업장평의회에 사전 설명하고 이를 문서화해야 한다. 둘째, AI가 인사평가 채용 업무배정 등 근로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 사업장평의회는 사전 협의 및 동의권을 가진다. 셋째, AI시스템이 근로자의 행동이나 성과를 모니터링하는 경우 사업장평의회는 그 사용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 넷째, 사용자는 사업장평의회와 노동자에게 AI 관련 교육을 제공하고 기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업무형태에 적응하기 위한 공동결정도 권장된다. 예를 들어 도서관 좌석처럼 업무 책상을 공유하는 ‘데스크쉐어링’, ‘재택근무’, 효율성을 높이는 ‘애자일 업무방식’ 등에 대응하기 위해 정보 접근권과 의사결정 참여권을 명시하는 사례가 제시된다.

◆원격·하이브리드 근무도 보호 = 이러한 예시를 법제화하려는 노력도 이어졌다. 2024년 독일 정부와 의회는 사업장평의회법을 다시 개정해 기업이 AI기술을 도입·활용할 때 사업장평의회의 정보 접근권과 협의 권한을 법적으로 명시했다.

이에 따라 사업장에서 AI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사업장평의회는 해당 시스템의 기능, 목적, 의사결정 방식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갖게 됐으며 기술 도입 시 투명한 설명과 협의 절차 또한 법에 명시됐다. 인사평가 채용 업무배정 등 AI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경우 사업장평의회는 사전 협의 및 동의 절차를 요구할 수 있도록 규정됐다.

또한 원격근무, 하이브리드근무, 디지털 감시 시스템 등 근로자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사업장평의회의 결정권이 강화됐다. 기업은 AI시스템의 알고리즘, 데이터 처리 방식 등을 명확히 설명하고 문서화해야 한다. 사업장평의회는 이를 검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법 개정은 디지털·AI 시대에 적합한 노사협력 모델과 노동법 개정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와 함께 연방정부 주정부 지방정부도 디지털 전환과정에서 공동결정 강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더하고 있다.

◆AI보다 사람의 지혜 필요 = 독일은 디지털·AI 시대에 공동결정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왜 그토록 열의를 보일까? 산업의 대전환 과정에서 노사 간 균형을 지키고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다. 공동결정제는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자가 생산에 대한 의사결정에도 참여하려는 보편적 욕구를 제도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경영을 계획하고 결정하는 집단과 실행하는 집단 사이의 긴장을 완화해왔다.

인더스트리 4.0 시대 독일은 경제적 효율성, 사회적 형평성, 민주적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며 공동체적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지키는 국가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사람의 공동결정에는 경계심을 보이면서도 AI의 자율결정에는 환호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AI보다 사람을 믿는 지혜다.

정미경

독일정치경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