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노동법, ‘디지털 노동기본권’으로 재편돼야

2025-11-14 13:00:30 게재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기술의 격차인 ‘디지털 격차’는 이제 ‘누가, 어떻게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확장되고 인공지능(AI)이 이 격차 위에 결합되면서 노동현장은 전례 없는 불평등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2024년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78.4%가 ‘AI 기술이 필요하다’고 응답했지만 실제 활용 기업은 30.6%에 불과했다. 제조업의 활용률은 23.8%로 서비스업(53%)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 역시 뚜렷하다. 독일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독일 노동자의 35%만이 직장에서 AI를 사용하며 사무직의 45%에 비해 생산직은 21%에 그친다.

AI 시스템, 데이터에 기반 구조적 차별 유발

“AI 활용의 격차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임금, 고용 안정성, 교육 기회 등 노동 질 전반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불평등의 중심에는 ‘알고리즘 차별’이 있다. 차별은 2020년 ‘알고리즘 사용을 통한 차별 위험’ 연구로 독일 연방차별금지청이 알렸다. 구체적으로 채용 과정의 차별은 음성·표정 인식 AI가 여성과 비원어민 지원자에게 불리한 평가를 내렸다. 온라인 구인 플랫폼은 남성에게 기술직 광고를 여성에게는 서비스직 구인광고를 주로 노출했다.

신용평가 알고리즘에서는 이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우편번호만으로 신용평가에 낮은 점수를 부여하는 ‘우편번호 차별’이 확인됐다. 부동산 임대심사에서는 특정 출신지역 지원자가 ‘위험한 그룹’으로 분류돼 계약 기회를 잃었으며, 소비·보험·의료 영역에서도 성별·연령·장애 여부에 따라 특정 집단에 불이익을 줬다. 보고서는 “데이터에 내재된 사회적 불평등이 알고리즘을 통해 구조화·강화된다”고 진단했다.

이처럼 AI가 명시적 의도 없이도 사회적 편견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독일 연방차별금지청은 “AI 시스템이 데이터에 기반해 구조적 차별을 유발한다”고 지적하며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검증의무’를 강화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차별 피해자에게 AI 결정에 대해 정보열람권을 부여하고 기업은 알고리즘의 구조와 판단 기준을 일정 부분 공개해야 한다.

아직 AI 관련 법률이 없는 영역에서 법적 대응은 ‘일반평등대우법’을 통해서 이뤄진다. 주목할 조항은 일반평등대우법 제3조 제2항이다. 이 조항은 ‘표면상 중립적인 기준이라도 특정 집단에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면 간접차별로 본다’고 명시한다. 이는 AI에 의한 구조적 차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즉 AI가 성별 중립적으로 설계됐더라도 결과가 여성이나 장애인, 고령층에 불리하다면 일반평등대우법 위반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독일은 채용·대출·보험 심사 알고리즘에 일반평등대우법상 간접차별의 적용 가능성을 검토하는 법적 논의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한국, 산업진흥 중심 설계 노동시장 불평등 고려 부족

유럽연합(EU)은 2024년 ‘인공지능법(AI Act)’을 최종 통과시켜 고위험 AI 시스템에 대해 데이터에 반영된 편견에 의해 차별이 발생하는 ‘데이터 편향 제거’,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투명성’, AI에 의한 판단이 차별을 조장하는지에 대한 ‘영향평가’를 의무화했다. 미국 콜로라도주는 ‘AI Act(SB24-205)’를 제정해 개발자와 사용자 모두에게 ‘합리적 주의의무’를 부과하고 차별 위험을 사전에 평가하도록 했다.

이에 비해 2024년 12월 26일에 국회에서 통과됐고 2026년 1월 22일 시행 예정인 법 한국의 ‘인공지능기본법’은 산업진흥 중심으로 설계돼 노동시장 차별과 불평등 문제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AI가 채용·평가·해고 등 노동과정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노동법적 규제와 디지털 인권 보장이 시급하다.

AI 시대의 노동법은 근로시간과 계약 규제를 넘어 ‘디지털 노동기본권’으로 재편돼야 한다. 노동자는 AI 결정과정에 대한 ‘설명권’, 부당한 자동화 결정에 대한 ‘이의제기권’, 알고리즘 설계·평가 과정에 참여할 ‘노사협의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또 기업은 성별·연령·고용형태에 따른 재교육과 직무전환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 독일 연방노동부는 ‘디지털 역량 강화 협약’을 통해 기업이 AI를 도입할 때 노동자에게 교육과 재훈련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정책이 아니라 디지털 전환 속 노동권 보장을 위한 법정책적 접근이다.

독일의 사례는 AI가 기술적 혁신을 넘어 노동시장 불평등의 재생산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데이터 속 사회적 편견이 자동화 과정을 통해 강화될 때 법적 대응의 핵심은 산업진흥이 아니라 차별 예방과 권리 보장이어야 한다. 한국 역시 단순한 AI 윤리 선언을 넘어, 노동자의 설명권·이의제기권·참여권을 제도화하고,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검증의무를 명문화해야 한다. 나아가 AI 활용 격차를 완화하는 디지털 역량 강화 정책을 병행할 때 기술 발전과 평등의 조화가 가능하다.

황수옥

독일정치경제연구소

노동법·차별금지법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