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콜드파리는 이방인들이 빚어낸 국제예술의 용광로였다

2025-11-27 12:44:55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예술 수도, 파리를 빛낸 아방가르드 미술 (22)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이 글은 먼저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흐름, 즉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에 이어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와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이로써 재현중심의 고전미술은 표현중심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이제 서양미술은 모더니즘의 본 막으로 들어선다.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아르누보, 빈 분리파 미술에 이어 나타난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폐허와 반성 속에서 태동한 예술의 응답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사이는 예술의 본질, 형식, 목적에 대한 총체적 전환과 실험이 이어졌다. 이제 형식의 질서, 정신의 리듬을 추구한 추상미술과 신조형주의에 이어 인간의 본질을 회화에 되물었던 에콜드파리 미술을 살펴본다.

에콜드파리(École de Paris)는 1900년대 초이래,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파리에서 활동한 이방인 예술가들의 공동체를 일컫는다. 이들은 특정 양식이나 기법을 따르지 않았기에 사조는 아니었다. 출신지와 민족, 언어, 종교는 제각각이었고 각기 독자적으로 활동했기에 그들은 파리화단의 이방인이자 경계인이었으며 작품은 혼종성과 독자성을 지녔기에 그들의 미학은 사조를 초월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유럽 각지에서 미술 수도인 파리를 동경하거나 망명으로 건너온 화가들이었다. 다만, 벨에포크 시기 파리의 달동네였던 몽마르트르와 센강 남쪽의 신흥 예술지로 떠오른 몽파르나스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점이 공통점이었다. 활동 초기에 이들은 에콜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와 살롱 중심의 아카데믹 미술계, 그리고 그에 도전하면서 비주류에서 주류로 부상한 야수파,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 가려진 비주류였다.

그러나 1920~1930년대에 접어들며 샤갈, 모딜리아니, 수틴 등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이들의 작품은 몽파르나스의 화랑, 국제비평계, 수집가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시기가 곧 에콜드파리의 황금기였다. 이제 그들은 주변에서 제도권 밖의 주류, 혹은 비공식적인 제2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로써 파리 미술계는 두 개의 축으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에콜 데 보자르와 살롱을 중심으로 한 전통 주류, 다른 하나는 몽파르나스의 카페와 작업실을 기반으로 성장한 신주류였다. 전자는 프랑스 미술의 정통성과 자존을 지키려 했고 후자는 이방인 예술가들이 그들의 기억과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다. 이렇게 에콜 드 파리는 사조 사이의 경계의 예술로서 주류와 주변의 틈 속에서 빛이 난 감성의 아방가르드였다.

에콜드파리는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한 느슨한 국제 예술가 네트워크

에콜드파리의 탄생 배경과 그 특징은 어떠한가? 에콜 드 파리는 직역하면 파리 학파라는 뜻이다. 이 말은 1920년대 중반, 프랑스 미술비평가들이 몽파르나스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화가들을 통칭하면서 유래되었다. 동유럽, 라틴, 유대계 예술가들의 대거 유입을 경계하고 거리를 두기 위한 일종의 프레임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들은 파리화단의 이방인, 경계인, 비주류로서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의 미술은 국적, 형식, 사조도 초월해 존재의 감정과 고독을 시각화한 감성적 기록이었다. 그러나 비록 학파(School)라는 이름은 공유했어도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 베네치아학파, 19~20세기 전환기의 비엔나학파와는 성격이 달랐다. 기존 학파들은 동일지역 출신 화가들 사이에 공동의 양식과 미학적 정체성이 있었다.

하지만 에콜드 파리는 단지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한 느슨한 국제 예술가 네트워크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념·형식·집단성을 가진 사조를 형성하지 못했으며 공동의 감수성(망명, 향수, 사랑, 해방, 이방성, 내면 표현)을 바탕으로 한 혼성의 미학을 추구했다. 샤갈은 표현주의적 색감 + 초현실적 상징 + 민속적 이야기를 뒤섞었고 모딜리아니는 르네상스의 이상미 + 아프리카 조각의 얼굴에서 영향을 받은 조형미 + 에로티시즘을 결합했으며 수틴은 색채와 질감을 통해 감정을 폭발시켰다. 이처럼 에콜드파리는 정체성의 유랑, 형식의 혼종, 삶의 유배라는 요소가 배어있는 미술이었다. 이는 에콜드파리 미술의 특징이면서 감상의 핵심 포인트가 된다.

에콜드파리는 국적, 형식, 사조도 초월한 혼성 적이며 감성적인 미술

필자는 지난해 6월 11일부터 15일간은 오랑주리, 오르세 미술관,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 지역 등을, 6월 25일부터 27일간은 니스의 샤갈 미술관, 생폴드방스의 샤갈 마을 등을 방문하면서 에콜드파리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성전이라 에콜드파리의 작품은 제한적이었으나 오랑주리미술관은 모딜리아니, 수틴 등의 작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다. 그들의 그림 속에는 파리의 이방인으로서 살았던 소외와 고독이 배어있는 듯 느껴졌다. 파리 북쪽의 몽마르트르와 남쪽의 몽파르나스는 그들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초기지였다. 몽마르트르의 바토 라부아르는 피카소와 모딜리아니가 화가로서의 꿈을 함께 키운 곳이었으며 몽파르나스의 라 로통드, 르 셀렉트 같은 카페는 피카소, 브라크, 모딜리아니, 샤갈 등의 안식처이자 창작의 실험실로 다가왔다.

남프랑스 니스의 샤갈 미술관은 샤갈이 직접 설계에 참여한 전용 미술관이다. 이곳에는 ‘창세기’, ‘출애굽기’ 등 성서 이야기 17점의 대형연작을 비롯해 드로잉, 판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등 450여 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미술관은 올리브나무 등이 아름다운 정원과 카페가 어우러져 마치 샤갈의 예술 세계를 엿보는 것 같았다. 니스 인근의 생폴드방스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중세 요새 마을로 샤갈이 말년을 보낸 곳이다. 담쟁이넝쿨이 멋진 베이지색 석조 건물과 골목 사이로 이어진 갤러리, 수공예품 가게, 샤갈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 라 콜롬브 도르는 예술가 마을의 매력이 넘쳐난다. 언덕길 끝자락의 마을 공동묘지에서 만난 샤갈의 묘는 한 예술가가 긴 여정을 마치고 평화롭게 잠든 안식처 같았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눈 부신 햇살과 고즈넉한 마을 분위기는 샤갈의 색채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샤갈의 ‘나와 마을’은 모더니즘의 인간적 확장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걸작

이제 에콜드파리의 명작들을 살펴본다. 마르크 샤갈(1887~1985)은 20세기 회화사에서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독보적인 화가였으며 유랑과 신앙, 사랑과 상실, 기억과 환상을 색으로 빗어낸 색채의 마술사였다. 러시아 변방인 벨라루스의 작은 유대인 마을에서 태어난 샤갈은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생폴드방스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언제나 경계 너머에 있었고 그의 그림은 늘 현실 너머의 내면을 향해 있었다.

그는 유대인 정체성과 러시아 민속, 기독교 신화와 현대적 색채 감각을 접합시킨 경계의 화가였다.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910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 들로네 등과 교류하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러시아로 귀환해서는 고향 비텝스크 예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으나 공산정권과 갈등 속에 1923년 파리로 망명, 에콜 드 파리의 중심 화가로 자리 잡았다. 1941년에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뉴욕에서 활동하다 1948년 프랑스로 귀환하면서 생폴드방스에 정착해서 후기 작품을 이어갔다.

나와 마을
나와 마을(그림 1)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1, 192.1 × 151.4 cm 캔버스에 유채, 출처: Wikimedia Commons)는 뉴욕현대미술관(MoMA)가 소장하고 있는 샤갈의 대표작이다(그림 1). 이 작품은 샤갈이 파리에 온 뒤 자신의 고향을 기억하며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에는 녹색 얼굴의 남자, 왼쪽에는 흰색과 푸른빛이 섞인 얼굴의 염소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두 존재의 눈동자는 한 줄기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과 동물, 기억과 현실 사이의 감응과 교감을 시각화한 장치다. 염소의 뺨에는 젖을 짜고 있는 여인이 작게 그려져 있고 배경에는 정교회 교회당, 집들이 비스듬히 뒤집혀 있거나 공중에 떠 있다. 중력과 원근을 무시한 구성이다. 색채는 강렬하고 환상적이다. 모두 감정과 기억이 빚은 색이다. 한마디로 마을은 실제가 아니라 기억 속의 풍경이다. 입체적 구도, 야수파 적 색채, 꿈과 기억, 감정이 겹쳐진 초현실적 구성은 이 작품이 존재의 정체성과 감정의 층위를 시각화한 미학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모더니즘의 인간적 확장을 보여주는 20세기 회화의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모딜리아니의 ‘누워 있는 누드’는 20세기 인물화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걸작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도 특정 사조에 속하지 않고 선과 형상, 절제된 감정으로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 화가였다. 또한 르네상스의 이상미, 아프리카 조각의 조형미, 현대적 감각을 융합해 인간의 깊은 내면을 형상화한 인물화의 거장이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리보르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병약한 유년기를 거쳐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미술을 수학한 뒤 1906년 파리로 이주해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샤갈, 브랑쿠시 등과 교류하며 한때 조각에 몰두했으나, 건강 악화로 회화로 전향하게 된다. 긴 목과 타원형 얼굴, 눈동자 없는 아몬드 같은 눈, 단순화된 윤곽과 색면은 모딜리아니의 회화적 언어다. 초상화 속 인물들은 말이 없지만 침묵 속에 짙은 감정이 배어있다. 단지 인물의 묘사가 아니라 존재의 침묵을 담아낸 심리적 형상화였다. 그는 자화상, 14세 연하의 연인이자 부인이었던 잔 에뷔 테른의 초상화, 그리고 누드 연작을 중심으로 작업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작품 대부분은 경매에서 고가로 거래되면서 미술관보다는 개인 컬렉터들이 소장하고 있다.

누워 있는 누드
누워 있는 누드(그림 2)

누워 있는 누드’ (Nu Couché, 1917, 60.6 × 92.7 cm, 유화, 출처: Wikimedia Commons)는 폴란드 출신 미술상의 후원으로 모딜리아니가 1916~191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그렸던 누드 연작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그림 2). 1917년 파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누드 연작은 외설 시비로 경찰에 의해 철거되기도 했으나 이 작품은 20세기 인물화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2015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중국인 컬렉터에게 약 1억 7000만달러에 낙찰되면서 세계적 주목을 받기도 했다. 길고 유연한 목, 무표정한 눈, 붉지만 따뜻한 피부톤, 단순한 윤곽선과 배경은 인물의 묘사보다는 존재의 내면과 고독을 말해준다.

모딜리아니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질병, 빈곤, 약물중독 속에서도 자신만의 회화 세계를 구축했지만 1920년 결핵성 수막염으로 36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그리고 이튿날, 임신 중이던 연인 잔 에뷔테른도 투신하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영화 모딜리아니(2004)에서 그는 “나는 누가 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린다.”(I paint the way I feel, not the way I’m told)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는 보헤미안 예술가였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육체묘사가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 조형적 실험이었다. 존재의 형상화,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을 걸작으로 부르는 이유다.

수틴의 ‘소의 시체’와 반 동겐의 ‘프릴 장식의 여인’은 존재를 형상화한 명작

샤임 수틴(1893~1943)은 강렬한 붓질, 뒤틀린 형상, 감정의 격렬한 분출을 통해 독자적인 회화를 구축한 화가였다. 벨라루스의 스미로비치에서 유대계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폭력과 가난, 차별 속에서 성장했으며 민족적 박해와 배고픔, 고독은 그의 감각을 조형했다. 빌뉴스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1913년 파리로 이주해서는 몽파르나스에서 모딜리아니 등과 함께 활동했다.

소의 시체
소의 시체(그림 3)

소의 시체’(Carcass of Beef, 1925년경, 140.3 × 107.6 cm, 유화, 출처: Wikimedia Commons)는 프랑스 그르노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3). 캔버스를 가득 채운 해부된 고깃덩어리는 붉은 피, 무너진 형상, 역동적인 붓질을 통해 고통의 형상을 육체로 환원시킨다. 보기에 거북할 정도로 불편하지만 인간 존재의 실존적 불안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단순한 정물화를 넘어 생명과 소멸의 경계를 극적으로 시각화한 걸작이다.

키스 반 동겐(1877~1968)은 야수파 적 색채실험과 에콜 드 파리의 경계성과 세속적 감수성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한 화가다. 네덜란드 델프스하펜 출신인 그는 1897년 파리로 이주해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파리의 사교계 인물, 부르주아 여성, 카바레 가수 등 현대 도시 여성의 관능미와 도회적 아름다움을 독창적으로 그려냈다.

프릴 장식의 여인
프릴 장식의 여인(그림 4)

프릴 장식의 여인’(La Femme au Jabot (Woman with Frill), 1911, 유화, 98×79cm, 개인소장, 출처: 위키미디어)은 그의 대표적인 여성 초상화다(그림 4). 커다란 검은 색 모자와 하얀 프릴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여인은 한 손을 턱에 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얼굴의 흰 피부, 붉은 머리, 푸른 그림자는 절묘하게 대비되며 극적인 리듬감을 준다. 여인의 표정은 오만하면서도 고독하다. 이는 단순한 초상을 넘어 20세기 초 도시 여성의 자의식과 감정의 복잡성을 시각화하려는 반 동겐의 예술적 의도였다.

에콜드 파리는 모더니즘 미술의 확장과 현대미술의 국제화에 기여

에콜드 파리는 파리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다문화적 예술공동체로서 20세기 미술사에서 사조 바깥의 미학 혹은 사조 사이의 틈을 잇는 다리처럼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물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신 에콜드파리가 존재했으나 뉴욕이 국제미술의 중심지가 되면서 빛을 잃었다. 그러나 양차 대전 사이 샤갈, 모딜리아니, 수틴, 반 동겐 등은 국제적 감성의 용광로였던 에콜드 파리 속에서 인간성과 감정을 회복한 예술가들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의 미술은 사조를 초월한 예술의 혼종적 생태계였다.

여기서 에콜드파리는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사조 바깥의 예술로서 화가 개개인의 삶, 감정, 정체성 그 자체가 미학이 된 최초의 흐름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보헤미안 예술가들이 파리를 세계 미술의 수도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예술의 중심은 프랑스 내부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온 이방인들의 내면성과 다양성이 더해져 미술사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에콜드 파리는 한편으로는 모더니즘 미술의 확장, 다른 한편으로는 후대 화가들에게 미학적, 존재론적 영향을 남기면서 현대미술의 국제화에 이바지했다. 이제 유럽미술은 전후의 트라우마와 철학적 위기 속에서 형태를 의도하지 않는 미술, 곧 앵포르멜(Informel)이라는 비정형 추상미술로 이동하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