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포르멜은 형식 이전의 감각을 회복한 추상미술이었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전쟁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실존의 미학 (23)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과 모던 미술’을 재조명해본다. 본 연재는 먼저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흐름, 즉 르네상스-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에 이어 모더니즘의 서곡인 인상주의와 서막인 후기 인상주의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재현중심의 고전미술은 표현중심의 모더니즘 미술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음을 확인했다. 모더니즘의 본 막으로 등장한 야수파-입체파-표현주의-아르누보-빈 분리파에 이어 나타난 다다이즘-신즉물주의-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와 반성 속에서 태동한 예술의 응답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한 추상미술-신조형주의-에콜드파리는 예술의 본질, 형식, 목적에 대한 총체적 전환과 실험이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유럽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실험한 앵포르멜을 살펴본다.
앵포르멜(Informel)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폐허 속에서 1940년대 말~19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미술이다. Informel은 불어로 형식(forme)이 없다(in-)는 뜻이지만 단순히 형식을 해체하거나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존의 조형 원칙이나 재현적 구도에서 벗어나 감각적이고 비정형적인 표현을 추구하는 미술이었다. 그렇기에 앵포르멜은 사조라기보다는 전후 유럽미술 전반에 나타난 탈형식적 추상미술의 흐름이었다. 전쟁은 그야말로 인간의 삶을 무너뜨렸고 예술의 언어와 형식도 붕괴시켰다. 장 뒤뷔페, 장 포트리에 등의 앵포르멜 화가들은 그 무너진 자리에 형태 이전의 감각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회화는 더는 묘사가 아니었고 형식은 단지 부산물이었다. 질료는 더럽고 균일하지 않았으며 도구는 붓이 아닌 나무 막대, 손바닥, 손톱 등을 사용하였고 캔버스 위에는 질감이 강조된 긁힘, 얼룩, 침전, 자국 등이 남겼다. 그것은 바로 감각의 기록이며 존재의 흔적이고 침묵의 미학이었다.
앵포르멜 회화의 정신적 기반이 된 것은 니체 이후 하이데커, 사르트르, 카뮈,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실존주의 철학과 현상학적 사유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철학은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고통받는 개인의 체험과 감각, 그 존재의 조건 자체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앵포르멜은 이러한 철학에 대해 손의 언어와 물감의 결로 응답한 회화였다. 그렇게 앵포르멜은 재현에서 현상적 체험으로, 이성의 언어에서 감각의 바닥으로, 미의 이상에서 존재의 흔적으로 예술의 중심을 이동시킨 것이다. 앵포르멜은 한마디로 전쟁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실존의 미학이었다. 이제 말이 사라진 자리, 문명의 기호가 불신받는 자리에서 추상미술은 앵포르멜을 통해 더 직접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앵포르멜은 전후 형식 너머 감정의 흔적인 얼룩, 감각, 흔적이 남긴 미술
앵포르멜의 구체적 배경과 그 특징은 어떠한가? 전후 유럽은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 히로시마 원폭, 수백만의 사상자, 폐허가 된 도시 등 문자 그대로 문명의 종말을 경험했다. 예술은 더 이상 고상할 수 없었고 철학은 이성의 보편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으며 회화는 아름다움을 담을 수 없었다. 이제 유럽은 새로운 예술의 언어가 필요했다. 바로 그 시기에 미술비평가 겸 화가였던 미셀 타피에는 1951년 ‘Un Art autre(또 다른 예술)’ 에서 앵포르멜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입체파나 초현실주의 같은 기존의 아방가르드조차도 형식이나 철학에 갇힌 계획된 실험이었다고 비판하며 그보다 더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회화, 즉 말이 아닌 얼룩, 형식이 아닌 감각, 조형이 아닌 흔적으로 남겨진 회화를 앵포르멜로 규정한 것이다.
앵포르멜의 하위 양식으로 미학적 토양을 공유한 타시즘(Tachism) 도 전후 추상미술의 주요 흐름 중 하나였다. 프랑스어 tache(얼룩)에서 유래된 타시즘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중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미술로 조르주 마튀, 한스 하르퉁 등이 대표적이다. 캔버스에 우연히 생긴 얼룩이나 자국을 의도된 형식보다 우선시하는 행위 중심의 회화였다. 이들의 작품 발표 당시 대중의 반응은 “이건 아이의 낙서냐, 정신병자의 그림이냐?.” “이건 그림이 아니라 벽면의 얼룩이다.” 등과 같이 한마디로 조롱거리였다. 그러나 앵포르멜과 타시즘은 전후 유럽미술이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시기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한 미술이었다. 그림을 읽으려 하기보다는 붓의 흔적, 색의 질감, 선이 만드는 리듬과 공간감을 느끼려 하는 것이 감상의 포인트가 된다.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는 전후 미술의 상생적 흐름
필자는 지난해 6월 12일부터 13일간은 파리의 퐁피두 센터, 7월 24일부터 26일간은 베를린의 신 국립 회화관, 국립 현대미술관 등을, 8월 3일부터 5일간은 브뤼셀의 현대 미술관, 세기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앵포르멜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앵포르멜 미술은 생각보다 접하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앵포르멜이 조직된 사조라기보다는 개별작가들의 실험적 시도에 가까웠고 동시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처럼 세계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후 유럽은 국가 재건에 집중하느라 미술관이 작품을 구매할 여력이 없었으며, 그 결과 앵포르멜 작품의 상당수는 공공기관이 아닌 개인 컬렉터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또한 전후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MoMA, 구겐하임, 휘트니 미술관 등이 1950년대 이후 국제 미술시장의 큰손 역할을 하며 앵포르멜 작품을 사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는 2차 세계대전 후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탄생했지만 내면의 고통과 실존적 감각을 회화의 물질성과 행위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깊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장 포트리에, 장 뒤뷔페 등이 전쟁의 트라우마를 얼룩, 긁힘, 파편화된 형상으로 표현했다면 미국에서는 잭슨 폴록, 드 쿠닝, 뉴먼, 로스코 등이 무의식적 행위와 감정의 흔적으로 표현했다. 나치의 탄압, 유대인 박해, 전쟁의 공포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 화가와 비평가(뒤샹, 몬드리안, 브르통, 에른스트, 호프만, 타피에 등)들은 양측의 표현 양식에 상호 영향을 미쳤고 그 흐름 속에서 미술의 중심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전후 미술의 중심축이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두 미술은 형식의 해체와 존재의 절규를 서로 다른 언어로 표출한 전후 추상미술의 상생적 흐름이었다.
장 뒤뷔페의 ‘파리의 아파트’는 전후의 파리를 비문명적 시선으로 그린 명작
이제 앵포르멜의 명작들을 살펴본다. 장 뒤뷔페(1901~1985)는 날것의 예술을 뜻하는 아르 브뤼(Art Brut) 개념의 창시자이자 이를 앵포르멜 회화로 실천한 대가였다. 그는 모래, 석고, 타르, 흙, 폐기물 등 비문명적 재료와 조잡하고 서투른 표현 방식으로 기존 미술의 질서와 형식을 전복하며 예술의 경계를 문명 바깥으로 확장하였다. 프랑스 항구도시 르아브르의 와인상인 가정에서 태어난 뒤뷔페는 18세 때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6개월 만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1920년대 초에는 앙드레 브르통과 교류하며 초현실주의를 접하기도 했지만 가업인 와인 사업을 하는 등 방황 끝에 41세에 화가의 길을 걷는다.
그는 “문명화된 예술은 거짓말을 한다”라고 선언하며 정신병 환자,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렸다. ‘아웃사이더의 대사제’(Grand Maître of the Outsider, 1947, 유채혼합, Private Collection)는 바로 그런 그림이다. 이 그림은 현재 개인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어 미술관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뒤뷔페의 아르 브뤼 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주 인용된다(그림 1). 두텁고 거친 마티에르, 일그러진 형상, 흙빛과 단색계열의 색상으로 기존 미술계, 사회 질서, 문명 체계로부터 배제된 아웃 사이더를 상징한다.
‘파리의 아파트’(Apartment Houses, Paris, 1946, 유화, 모래, 목탄 혼합, 114.3 × 146.4 cm, 출처 : www.moma.org)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2).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파리의 아파트 풍경을 비문명적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모래, 목탄, 유채를 섞어 만든 화면에는 일상의 공간이라기보다 시간에 깎인 벽, 피로에 짓눌린 형상, 문명에서 이탈한 풍경 등의 이미지로 어지럽게 얽혀 있다. 규칙적으로 보이는 창문과 건물들의 선은 삐뚤빼뚤하고 거리의 질감은 얼룩지고 거칠며 건물 안팎의 사람들은 파편처럼 박혀 있다. 세련된 도시가 아닌 문명이라는 허울 아래 드러나는 도시의 침묵을 표현한 것이다. 화면은 곱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래서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형성한다”라고 말했다. 드뷔페는 그야말로 문명 바깥의 진실을 통해 오늘날 가장 예민하고 현대적인 미술의 출발점을 열어젖힌 화가였다.
장 포트리에의 ‘인질의 머리’는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형상화한 명작
장 포트리에(1898~1964)는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형상화한 앵포르멜 회화의 선구자였다. 뒤뷔페가 앵포르멜을 철학적으로 확장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화가였다면 포트리에는 물질의 언어를 가장 먼저 실천한 화가였다. 미셸 타피에는 그의 평론집에서 포트리에의 ‘인질들(Les Otages)’ 연작을 ‘비 형식 추상의 원형’으로 명명하며 앵포르멜의 시발점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뒤뷔페, 발터 슈넬, 한스 하르퉁 등이 동참하면서 앵포르멜이 미술사적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파리에서 태어난 포트리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 로열 아카데미 등에서 미술을 배웠다. 그러나 제도적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곧 학교를 떠난 후 자신의 감각과 방식대로 그림을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참혹한 경험을 한 그는 예술관을 바꾸었고 1920~1930년대의 방황 끝에 그는 점차 재료 그 자체가 말하는 회화를 실험하게 된다. 안료, 석고, 종이, 색의 덩어리, 눌러 찢긴 표면 등 비전통적 재료와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형상을 해체하고 고통과 침묵을 화면의 질감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기법이었다. 뒤뷔페가 문명의 바깥에서 날것의 예술을 구현했다면 포트리에는 문명의 내부에서 벌어진 폭력의 흔적을 재료의 표면에 드러나게 한 것이다.
‘인질의 머리’(Tête d’Otage, 1944~45, 약 35 × 27 cm, 유화 혼합재료, 출처: www.wikiart.org)는 파리의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그림 3). 전쟁 중 파리 근교에서 나치에 의해 무참히 처형된 인질들의 소식을 듣고 제작한 ‘인질들’ 연작 가운데 하나다. 석고 위에 기름 안료와 종이를 얹고 다시 긁고 누르고 덧칠한 화면에는 부풀어 오른 살덩이, 침묵하는 상흔이 응축되어 있다. 형체는 흐릿하고 눈과 입은 으깨지거나 번져 있으며 색은 창백한 살빛과 흑갈색의 그림자가 얼룩처럼 스며든다. 모호한 형상은 전쟁이 남긴 폭력과 희생자들의 고통을 말해준다. 포트리에는 “나는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남긴 잔존물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는 주제·구도·형상보다도 질감·재료·표면의 울림이 더 강력한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감각과 기법은 타시즘, 마티에르 회화, 새로운 추상미술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그리는 대신 상처 입은 시대의 침묵을 캔버스에 기록한 화가였다.
조르주 마튀의 ‘부빈 전투’는 유럽 추상미술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걸작
조르주 마튀(1921~2012)는 한스 하르퉁과 더불어 타시즘의 창시자이자 유럽 제스처 회화의 선구자였다. 프랑스 북부지역의 불로뉴-쉬르-메르에서 출생한 마튀는 루앙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나 정식 미술 교육은 받지 않은 채 독학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특히 역사적 전투를 주제로 한 대형 회화를 다수 제작했는데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부빈 전투’(La Bataille de Bouvines, 1954, 유화, 250 × 600 cm, 출처: www.centrepompidou.fr)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그림 4). 프랑스 중세사에서 결정적 승리로 기록된 1214년의 부빈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으나 화면 속에는 말과 칼, 병사나 깃발 같은 형상은 전혀 없다. 오히려 불꽃처럼 번지는 붉은 얼룩, 전율처럼 갈라지는 검은 선, 그리고 폭발하듯 터지는 흰색 물감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전장의 아수라장, 혼돈, 긴장, 공격과 방어의 격돌을 추상적인 색과 제스처로 번역한 것이다. 회화 자체가 곧 전투가 되어버린 작품이다. 마튀는 당시 단 몇 시간 만에 붓 대신 손, 막대, 물감투하, 스크래치 등으로 거대한 캔버스를 완성하는 즉흥적 퍼포먼스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붓을 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느낄 뿐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계획이 아닌 전율의 몸짓이었다. 부빈 전투는 실로 타시즘의 정점에서 유럽 추상미술의 전환을 알리는 걸작이었다.
앵포르멜과 타시즘은 형태·구도·전통적 조형 질서를 거부한 반형식 회화
전쟁은 인간이 믿어왔던 이성과 진보, 도덕과 예술에 대한 신념마저 무너뜨렸다. 앵포르멜은 그렇게 전쟁으로 무너진 세계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던 예술가들의 응답이었다. 그들은 회화의 중심을 사물의 재현에서 물질의 흔적과 내면의 충동으로 옮기며 물질성, 질감, 즉흥성을 추구하였다. 앵포르멜이 존재의 침묵을 질료의 자국으로 응시한 미학이라면 타시즘은 붓의 흔들림과 물감의 얼룩으로 감정을 분출한 회화적 제스처였다. 모두 형태·구도·전통적 조형 질서를 거부한 반형식 회화였다.
여기서 미술사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앵포르멜은 전후 유럽의 감정적·정신적 폐허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실존의 미학이었다. 둘째, 타시즘은 액션 페인팅, 마티에르 회화의 토대가 되었고 이후 퍼포먼스 아트, 설치미술, 개념미술 등으로 확장되었다. 특히 마튀의 작업 방식은 그라피티, 거리미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셋째, 이들은 추상을 기하학적 형태로 보던 고전적 관념을 무너뜨리고 감정, 행위, 물질의 미학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그 결과 회화는 단지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적, 철학적 발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앵포르멜과 타시즘은 전쟁 이후 붕괴된 조형 언어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회화적 실험이었다. 이제 본 연재는 유럽 모더니즘 미술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전후 미술의 중심은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를 독일의 ‘신표현주의’가 장식하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그 마지막 불꽃을 살펴보며 본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