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리스트가 재소환한 ‘12·12 군사반란’
SK가 이혼소송서 ‘노태우 비자금’ 재등장
신군부 부·영향력 세습, 독립몰수제 부상
‘노태우 비자금’이 SK그룹 이혼소송 과정에서 다시 드러나면서, 사실상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던 ‘12·12 군사반란’이 재조명되고 있다. 해당 비자금 리스트는 신군부 세력이 축적한 부와 영향력이 세습되고 있다는 논란으로 이어지며, 불법 재산 환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을 키우고 있다.
지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 내부 사조직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이날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며 군권을 장악했다. 또 서울 일대 군부대를 동원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등을 점령했다.
일부 장성들이 진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특전사령부의 김오랑 소령은 사령관실을 지키다 반란군의 총격에 전사했다. 이후 신군부는 1980년 5·17 조치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거쳐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은 전두환 정권 7년, 노태우 정권 5년 등 총 12년간 권력을 유지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역사 바로 세우기’가 추진되며 쿠데타 주역들이 처벌받았고, 대법원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두 전직 대통령은 1997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으며, 수천억원대 추징금 중 상당액은 끝내 환수되지 못했다.
전두환·노태우 사망 후 ‘12·12’는 점차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최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리스트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혼소송에서 공개되며 다시 논란이 촉발됐다. 노 관장측은 노 전 대통령이 고 최종현 선대 회장 등에게 맡긴 904억원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이는 1995년 수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은닉 비자금이라는 의혹으로 번졌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약 4600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기업들로부터 받은 뇌물 2682억원은 추징됐지만 나머지 자금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최근 대법원은 이혼소송 상고심에서 노 관장이 제기한 ‘300억원 유입설’에 대해 “불법원인급여로 재산분할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300억원을 비자금으로 명시한 것이다. 이어 대법원은 “뇌물로 조성된 자금을 가족이나 사돈에게 제공해 추적과 추징을 어렵게 한 행위는 사회질서에 반하는 만큼 법적 보호 대상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신군부 시절 조성된 비자금이 수십 년간 세습돼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시민사회는 불법재산 환수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을 요구해 왔다. 현행법은 피의자 사망 시 공소 제기가 불가능해 몰수·추징 절차도 중단된다. 범죄수익이 제3자에게 넘어간 경우에도 그가 ‘불법임을 알았다는 사실’을 검찰이 입증해야 해 환수가 사실상 어렵다.
이같은 문제 때문에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독립몰수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 독립몰수제는 유죄판결 없이도 범죄수익임이 확인되면 별도의 절차로 몰수할 수 있는 제도로, 피의자가 사망했거나 공소시효가 만료된 경우에도 환수가 가능하다. 미국·영국·독일뿐 아니라 말레이시아·태국·페루 등 여러 국가가 이미 운영 중이다.
이에 따라 독립몰수제가 도입되면 노태우 비자금이 첫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허연식 518기념재단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환수위원회 위원은 한 토론회에서 “노소영의 이혼소송에서 노태우 부인이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면서 알려진 선경그룹에 전달된 300억원이 비자금일 가능성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면서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의해 저질러진 비자금 조성을 철저히 조사할 특별조사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2대 국회 들어 관련 법안은 8건이 발의됐다. 여당은 캄보디아 사태를 계기로 독립몰수제를 당론으로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도 도입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한편,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으로 헌정 질서를 위협하는 군 권력의 위헌적 개입 우려가 다시 제기된 바 있다. 전문가들은 “12·12의 완전한 청산은 유사 상황의 재발 방지를 위한 헌법 수호와 제도적 정비가 동반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