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원달러 환율 대체 왜 이러나
최근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80원을 돌파하며 외환시장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며 이른바 ‘피벗(통화정책 전환)’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원화가치만 유독 맥을 못 추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구윤철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금융수장들이 총출동해 시장상황 점검과 구두개입에 나섰으나 시장의 공포는 오히려 1500원선을 향해 치닫고 있다. 과거의 환율급등이 국가부도 위기 같은 외부충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고환율은 한국경제 내부의 자금 흐름과 심리적 요인이 맞물린 ‘구조적 수급 불균형’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성격이 판이하다. 이는 물가와 양극화를 위협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생 위기’로 진화하고 있다.
경제·금융수장 환율잡기 나섰지만 시장은 외면
미국 금리가 내려가면 달러가치가 하락하고 원화가 강세를 보여야 한다는 경제학의 오랜 공식은 현재 한국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거주자의 해외투자 확대라는 구조적 변화에 있다. 국민연금과 같은 거대 기관부터 이른바 ‘서학개미’라 불리는 개인투자자들까지 국내보다는 해외자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들이 해외 주식 등 자산을 사들이기 위해 원화를 달러로 바꾸는 수요는 이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시적인 흐름이 되었다.
자본의 해외 유출이 환율상승의 고착화된 동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또한 한미관세협상의 조건인 3500억달러 투자나 정부의 적자성 예산편성, 최근 급격히 늘어난 통화량 증가 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에 달러 공급의 핵심 축인 수출 기업들의 행태 변화가 기름을 부었다. 과거 수출 기업들은 벌어들인 달러를 즉각 시장에 풀어 원화로 환전했으나 최근에는 환율이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달러를 기업 금고에 쌓아두는 ‘래깅(Lagging)’ 전략을 취하고 있다. 반대로 결제에 필요한 달러는 미리 사두는 ‘리딩(Leading)’ 현상까지 겹치며 시장에는 극심한 ‘달러가뭄’이 발생했다. 실제로 기업들의 달러 예금잔액이 한 달 새 21%나 급증했다는 통계는 시장의 심리가 얼마나 한쪽으로 쏠려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상황이 엄중해지자 정부와 외환당국은 가용수단을 총동원하며 시장방어에 나섰다. 특히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7일 장중 1480원을 넘어선 원달러 환율에 대해 “불필요하게 올라간 레벨(수준)은 조율(대응)할 수 있다”고 밝혔다. 외환당국 수장이 환율의 변동성이 아니라 수준을 평가하고 개입 의지를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정부의 대응방식을 보면 여전히 ‘관치’의 그림자가 짙다. 주요 수출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모아 달러 환전을 독려하고, 국민연금을 압박하는 방식은 단기적인 수급 조절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시장의 근본적인 불신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기업의 자율적인 자금 운용을 압박하거나 연기금의 수익률을 희생시켜 환율을 방어하려는 방식은 오히려 시장 참가자들에게 '당국이 내놓을 실효성 있는 카드가 없다'는 부정적인 신호를 줄 위험이 크다.
미봉책 아닌 근본적인 신뢰 회복이 관건
지금 필요한 것은 민간에 잠겨 있는 달러를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유인하는 정교한 정책 설계다. 이형일 기획재정부 차관이 언급한 세제 인센티브나 규제완화가 단순한 구호에 그쳐서는 안된다. 해외 자회사의 배당금을 국내로 들여올 때 법인세 부담을 완전히 없애주는 등 기업이 달러를 팔 명분을 확실히 제공해야 한다.
이창용 총재가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200억달러 대미투자를 조정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지켜져야 한다. 단기적인 수급 조절을 넘어 한국 증시의 매력도를 높이는 ‘밸류업’ 정책과 제도개선 등을 통해 해외로만 향하는 자본의 물길을 국내로 돌려놓는 근본적인 처방이 병행되어야 한다. 환율은 단순히 숫자의 변동이 아니라 우리 경제의 미래 가치에 대한 시장의 종합적인 성적표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고환율 국면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자본 유출의 시대’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대다. 당국은 시장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과감한 개입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관 협조라는 이름의 압박보다는 시장친화적인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1500원이라는 상징적 저항선이 뚫리기 전에 미봉책에서 벗어나 경제주체들이 스스로 원화를 보유하고 싶게 만드는 근본적인 신뢰회복에 전력을 다해야 할 시점이다.
안찬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