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베트남의 변신, 쿠바의 눈물

2025-12-31 13:00:01 게재

1991년 8월, 한여름 밤의 호찌민(옛 이름 사이공) 거리는 몹시 무더웠다. 어렵게 입국한 베트남의 여러 모습을 두 눈과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야간 산책에 나섰다. 연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거구역에 들어선 순간 놀라운 풍경이 발길을 막았다. 인도 곳곳에 켜진 촛불들이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촛불들을 피해 걸음을 지속하려던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고,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촛불이 놓인 곳마다 사람들이 길게 누워있었다. 좁고 냄새나는 집에서 다닥다닥 붙어 잠자야 했던 호찌민 시민들이 찜통더위와 악취를 견디다 못해 거리로 나와 잠자리를 꾸린 것이었다. 촛불은 “여기 사람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표지였다. “설마!” 싶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당시 베트남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50달러. 최빈국 수준이었다. 1975년 패망하기 전까지 자본주의체제였던 남부 베트남은 350달러(북베트남은 150달러)로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당시 대한민국과 베트남은 미수교 상태였지만 ‘삼숭(SAMSUNG)’ 브랜드만은 아주 유명했다. 몇 집 건너 한 대씩 보유하고 있어서 당시 베트남인들 사이에 ‘신분 과시’의 대명사로 통했던 흑백TV가 모조리 삼성전자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컬러TV가 퍼지면서 팔 곳을 잃게 된 국산 흑백TV가 그 시절 베트남에서는 대단한 사치품이었다.

남부 취재를 마치고 하노이로 올라가서는 더 놀라운 사실들과 마주쳤다. 명색이 베트남의 수도인데 ‘호텔’이 단 한곳 밖에 없었다. 베트남전쟁 시절 쿠바 통치자 피델 카스트로가 “미 제국주의자들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라”며 ‘탕로이(베트남어로 ‘승리’)’라는 이름을 붙여 기증한 호텔이었다. 외부 세계와 담을 쌓고 있었던 당시 베트남에 외국인 여행객들을 위한 호텔시설은 별 필요가 없었다. (군사초대소와 정부초대소 두 곳이 호텔처럼 운영되기는 했지만 일반 여행객은 출입이 금지됐다.)

'상전벽해' 베트남, ‘엑소더스’의 쿠바

그랬던 베트남이 지난해 GDP 4763억달러를 달성, 필리핀을 제치고 동남아 4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섰다. 1인당 GDP도 4711달러로 중진국 도약을 넘보고 있다. 하노이와 호치민은 초고층 빌딩 사이로 널찍한 도로가 뻗은 국제도시로 변모했고,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친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원동력은 베트남정부가 1980년대 말 도입한 ‘도이모이(쇄신)’ 정책이다. 정치적으로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되 경제부문에서는 자유로운 기업설립과 영리활동을 보장한다는 게 골자였다. 선진기술 도입을 위해 외국기업들에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했고, 얼마 전까지 총부리를 겨눴던 적국 미국과 프랑스 한국과 국교수립은 물론 최대 투자 및 교역파트너로 관계를 새롭게 맺었다.

“이념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공산당이라는 겉옷을 입은 것은 독립 및 해방전쟁의 상대국이 자본주의국가들이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보 반 키엣 당시 총리와 ‘아시아의 나폴레옹’으로 불린 독립전쟁 영웅 보 응웬 지압 장군을 비롯한 베트남 지도자들을 만날 때마다 들은 얘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백성들을 찌든 가난으로부터 건져내고 누구에게서도 업신여김 받지 않는 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적국’들의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런 베트남의 환골탈태가 최근 조명되고 있는 쿠바의 참상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영국 시사주간지 디 이코노미스트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쿠바인들의 삶은 참담 그 자체다. “막무가내로 공산주의 통제경제를 고집한 결과 주요 산업이 모두 망가졌다. 한 때 연간 1000만톤이 넘으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설탕생산량이 지난해 15만톤으로 급감했고, 2019년 이후에만 경제규모가 11% 쪼그라들었다.

쿠바인들의 89%가 극빈자로 전락했다. 70%가 하루 한끼 이상을 포기하고 있고, 아플 때 약국에서 약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3%뿐이다. … 견디다 못한 쿠바인들은 ‘탈출’로 살 길을 찾고 있다. 작년 78만8000명을 비롯해 2020년 이후 275만명이 해외로 이주했다. 나머지 78%도 쿠바를 빠져나가고 싶어 한다.”

의사와 기술자 등 전문직들의 ‘탈주’는 쿠바를 더 이상 정상국가로 존속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유엔 산하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경제위원회(ECLAC)의 최근 보고서에서 쿠바는 중남미 28개국 가운데 생산성 순위가 아이티에도 뒤쳐진 최하위로 평가됐다. 그런데도 70년 가까이 쿠바를 철권통치하고 있는 카스트로 형제 정권은 공산주의 이념을 불가침영역으로 틀어쥐고 있다. 권력독점을 위해서다.

베트남전의 최후 승자는 ‘시장경제체제’

올해는 베트남전쟁 종전 50주년이었다. 뉴욕타임스 등 서방의 진보매체들이 특집 기사를 내놓으면서 ‘공산베트남이 미국과 싸워 이겼지만 전쟁의 최후 승자는 서방 시장경제체제’라고 진단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2025년의 마지막 날, ‘올해의 화두(話頭)’로 나누고 싶어 소개한다.

이학영 경제사회연구원 이사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