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기술 패권 전쟁, ‘시간’이 무기다

2026-02-06 13:00:04 게재

싱가포르는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한가운데서 ‘시간’을 국가 전략의 중심 변수로 다루는 나라다. 첨단 인재에게는 탄력적인 근로시간과 높은 보상, 빠른 승진과 재도전 기회를 열어두는 한편, 법·제도 차원에서는 과도한 장시간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유지하는 이중 구조를 택하고 있다. 싱가포르 근무 시절 같은 프로젝트를 두고 한국 기업은 국내 근로시간 규제를 그대로 안고 뛰는 반면, 중국·일본 기업은 현지 관행과 유연한 인력 운용으로 대응해 나가는 장면을 자주 보았다. 한국 기업만 ‘타이트한 규제’라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경주에 나서는 형국이었다.

한때 중국 IT기업의 ‘996 근무제’는 과잉 경쟁과 인권 침해의 상징으로 비판받았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주 6일 근무하는 이 방식은 알리바바 텐센트 화웨이 등 첨단 기업의 고속 성장을 떠받친 그림자였다.

이와 함께 주 7일 하루 24시간 근무 및 대기를 뜻하는 ‘007 근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며 중국식 발전 모델의 비인간성이 국제적 논란거리가 됐다. 이후 중국 정부가 과로와 법규위반 등을 이유로 이를 공개 비판했지만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현장의 노동 강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미중 기술 경쟁, 시간은 가장 결정적인 자원

흥미로운 것은 유사한 현상이 최근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AI 반도체 우주·방산 바이오 등 전략 기술 분야에서 장시간 노동은 일종의 ‘선택된 미덕’처럼 받아들여진다. 상당수 MZ세대는 안정된 직장보다 고위험·고보상 산업을 택해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 조기 은퇴나 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삼는다.

이들에게 고강도 노동은 착취라기보다 ‘자기 투자’에 가깝다. 실제로 많은 IT·AI 기업과 스타트업은 채용 단계부터 주 6일 근무를 전제로 하고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확인한다고 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빠른 혁신과 극단적 성공 사례가 동시에 등장한다.

여기에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밀리면 미국의 미래는 없다”는 애국 담론이 덧입혀지며 장시간 노동은 개인의 열정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일부로 정당화된다. 오픈AI 엔비디아 주요 방산·반도체 기업에서 ‘미션 중심 조직문화’가 강조되는 이유다. 법과 제도로 강제하기보다 지분·보상·성장 서사를 통해 자발적 초과 노동을 유도하는 미국식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기술 패권 경쟁이라는 비상 국면에서 ‘시간’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자원이라는 인식이다. 최근까지 상대적으로 한 발 물러서 있던 유럽 역시 이런 흐름을 주시한다. 프랑스와 독일 등은 노동시간 규제를 충실히 준수하면서도 첨단 산업과 스타트업 등에서는 예외적 유연성을 제도 안으로 흡수해 보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현실은 불편하다. 자본도 시장도 기술 축적의 시간도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여전히 매우 경직적인 근로시간 규제를 유지하고 있다. 최대 주 52시간제는 노동자 보호와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불가결한 정책이지만 산업·직무·개인의 선택에 대한 구체적 구분 없이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측면이 있다.

해외 수주와 기술 경쟁의 현장에서는 최소한 경쟁국과 ‘평평한 운동장’에서 겨룰 수 있도록 규범을 보다 세밀하게 설계할 여지는 없을까. 첨단 기술 개발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AI 우주·방산 미래 모빌리티 같은 분야는 시간 싸움이다. 반도체특별법 논의 과정 등에서 근로시간 예외를 둘러싼 논쟁이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략 산업과 연구개발 영역에까지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면 창의와 혁신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속도를 잃을 수밖에 없다. 제한적이지만 보다 유연한 근로시간 운용 방안을 사회가 함께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국형 해법, ‘선택 가능한 유연성’ 열어야

물론 해법이 중국이나 미국식 ‘996’ 또는 ‘007’의 단순한 답습일 수는 없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높은 보상을 원하는 인재에게 ‘선택 가능한 유연성’을 열어주되 그에 상응하는 보상·휴식·전환의 권리를 보다 정교하게 제도화해보자는 것이다. 기술 패권의 판이 급격히 재편되는 시기에 남들이 전력 질주를 할 때 우리만 평속으로 걸어갈 수는 없다.

우리가 규범 논쟁에 머무는 사이에도 기술 패권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한국이 이 속도전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는 결국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의 가격’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안영집 전 주 싱가포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