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한국형 증거개시제도 특허로 확대해야
중소벤처업계의 오랜 숙원 가운데 하나가 이뤄졌다. 바로 한국형 증거개시제도(K디스커버리) 도입이다. 지난달 29일 전문가 사실조사와 자료보전명령 등을 포함한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상생협력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중소기업의 기술탈취 입증 어려움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소기업 기술 보호가 강화돼 더 많은 혁신의 동기가 될 것이다.
주요 내용은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를 통한 사실 조사 △법정 외 당사자 신문 △법원의 자료 보전 명령 등이다. 기술을 침해당한 기업이 손해배상 소송에서 전문가에게 기술 유용 사실관계에 대한 조사를 법원에 요청할 수 있다. 전문가는 기술침해 가해기업 사무실과 공장을 방문해 자료열람 등 조사를 수행한다. 조사결과는 법원이 증거능력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는 기술탈취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술기업에게 도움이 된다. 또 법원이 사건의 실체파악과 신속한 재판을 위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수행한 행정조사 자료 제출을 명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수ㆍ위탁거래 체결 이전에 발생한 기술자료 유용행위에 대해서도 이들 조항이 적용된다.
침해기업과 대등한 입장에서 소송 진행하는 기반 마련
디스커버리 제도는 변론기일 전에 소송 당사자들이 가진 증거와 서류를 서로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는 제도다. 한국형 증거개시제도는 중소기업의 기술 탈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됐다. 대기업과의 증거수집능력 격차를 줄여 대등한 입장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보톡스 건처럼우리 기업 간 분쟁이 해외에서 제기돼 국익이 저해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도입이 필요하다.
사실 행정부와 사법부 모두 이 제도 도입에 긍정적이었다. 지식재산처(옛 특허청)는 6년전부터 기술유출 대응방안으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법원도 이 제도 도입을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상고심 폭주를 해결하는 방안이어서다. 1심에서 주요 증거가 공개 공유되면 핵심쟁점만 다루게 돼 재판 속도가 빨라지고 합의나 조정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외국도 오래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적용하고 있다. 미국은 1938년 연방민사소송규칙 제정으로 증언녹취 서면질문 문서제출요구 등을 통해 광범위한 증거 공개를 강제한다. 영국은 1850년에 디스클로저라는 이름으로 법원의 명령에 따라 필요 문서를 열람ㆍ등사할 수 있다. 독일도 인스텍션이라는 명칭으로 특허법에 자료검증절차를 도입했다.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직접 증거조사를 시행한 뒤 보고서를 제출하는 방식이다.
일본도 2020년 특허 사증제도를 도입했다. 전문가가 침해자(기업)의 공장이나 시설에 출입해 기술적 사실관계를 조사한다. 알고케어-롯데헬스케어 사건 등 많은 기술탈취사건을 경험한 중소벤처기술기업은 상생법 도입만으로는 아직 미흡하다는 입장이다. 특허법에도 서둘러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오랫동안 제도도입을 주장해온 박희경 변호사에 따르면 이번 입법으로 피해기업의 기술이 영업비밀이거나 일반적 자료로 존재할 경우 상생협력법을 적용할 수 있다. 반면 피해기업 기술이 이미 특허 등록절차에 들어갔거나 등록된 경우 특허법에 따라 다루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특허법에 도입돼야 한다는 얘기다.
일부 대기업 등에서 반대 목소리가 있다. 반대 이유로 △소송의 남발 △기업 영업비밀 유출 위험 △소송 준비 기간과 비용 증가 등을 들고 있다. 소송 남발 주장은 집단소송제 도입 때처럼 불필요한 우려에 불과할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기술침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사전 방지 효과가 있어서 소송 증가와는 거리가 멀다. 박 변호사에 따르면 혁신과 개인재산권을 어느 나라보다 보장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이 제도 도입에 따른 영업비밀 누설 이슈가 별로 없다. 1심에서 집중해 실체적 진실이 파악된다면 쉽게 조정될 수 있고 상소하는 유인도 줄어들 것이다. 도리어 소송비용이 덜 들 수 있다.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 촘촘한 실무 지침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디스커버리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실무 지침 가이드라인이 촘촘하고 정밀하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침해기업 현장에 가서 회사 컴퓨터뿐 아니라 임직원 휴대폰이나 태블릿 등 이동형 저장장치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복잡한 기술의 경우 1명만 현장조사로 나가는 게 아니고 여러 전문가가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형식적 도입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피해기업에 도움될 수 있도록 정부(중기부)와 사법부(법원행정처)는 세부사항을 충실히 만들어 시행하길 바란다.
범현주 산업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