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일본의 ‘연결되지 않을 권리’ 정책
최근 일본에서는 ‘연결되지 않을 권리’의 법제화를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 권리는 근로자가 근무시간 외에 업무와 관련된 이메일 전화 메신저 등의 연락에 대해 응답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시간과 장소 제약 없이 업무수행이 가능해진 환경에서 이 권리는 근로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보호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아직 이 권리를 명확히 보장하는 구체적인 제도나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근무시간과 사적시간의 경계가 명확히 설정되지 않은 채 사실상 상시 대응을 전제로 한 업무관행이 유지되고 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 결과 장시간 노동의 부담이 공식적인 근로시간을 넘어 사생활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관련 규칙이나 제도 전세계 20여개국이 도입·시행 중
제국데이터뱅크가 2026년 3월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근무시간 외 연락에 관한 대응 규정을 마련한 기업은 11.6%로 전체 응답 기업 10곳 중 1곳에 그쳤다. 더욱이 이 가운데 ‘규정이 있으며 근무시간 외에는 연락하지 않는다’는 기업은 1.9%에 불과했다. 반면 ‘규정은 있으나 근무시간 외에 연락하는 경우가 있다’는 응답은 9.7%로 나타났다. 또한 전체 기업의 86.6%는 근무시간 외 연락과 관련한 별도의 규정을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본에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해외에서는 이미 제도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2016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노동법에 포함되었고,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탈리아 역시 2017년에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고용계약에 명시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또한 호주에서는 2024년 8월부터 노동자의 이 권리를 보장하는 법이 시행되면서 근무시간 외 고용주의 연락을 확인하거나 답변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했다. 이처럼 ‘연결되지 않을 권리’와 관련된 규칙이나 제도를 도입·시행하고 있는 국가는 대략 20개국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감안해 2025년 1월에 공표된 후생노동성의 보고서에서는 근무시간 외 연락의 허용 범위와 근로자가 응답을 거부할 수 있는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사 간 협의를 통해 사내규칙을 정비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일률적인 법적 금지보다는 각 기업의 업무 특성과 조직 문화를 반영한 자율적 규범 설정을 통해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는 접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장시간 근로 문제 안고 있는 우리나라도 기준 설정이 관건
한국정부도 최근 실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국정과제의 하나로 ‘연결되지 않을 권리의 법제화’를 제시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정부의 기본 입장은 퇴근 후 불필요한 연락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을 ‘불필요한 연락’으로 볼 것인지, 그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련 논의와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와 향후 마련될 ‘연결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한국에 있어서도 중요한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시간 근로라는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과 일본이 ‘연결되지 않을 권리의 법제화’를 둘러싼 논의와 정책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향후 제도 설계와 정책 추진에 있어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