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쇼크’에 흔들리는 물가…‘최고가격제’ 승부수 통할까
유가·환율·원자재 ‘3고’ 습격에 소비자물가 다시 ‘3%대’ 경고등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전격 시행 … 유류세 인하 카드 등도 ‘대기’
4월추경 통한 ‘직접지원’ 병행 … 고물가 장기화, 내수침체 불가피
우리 경제가 중동발 고유가와 고물가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섰다. 불과 한달 전까지 반도체를 필두로 한 수출 회복세가 경기 반등의 신호를 깜박였다. 올해가 성장률 반등의 발판을 마련하는 해가 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다. 하지만 트럼프가 쏘아올린 대외악재가 찬물을 끼얹는 형국이다.
특히 국민 실생활과 직결된 기름값과 장바구니 물가가 요동치고 있다. 정부는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 도입이란 전례 없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19일 정부 핵심관계자는 “정부 대책으로 발등의 불은 끌 수 있겠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국제유가가 150달러까지 오르면 올해 물가상황이나 성장률에는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중동사태와 ‘수입 물가’의 역습 =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0%를 기록하며 6개월 연속 2%대를 이어갔다. 하지만 3월 들어 중동 긴장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과 원화 약세가 겹치면서 물가인상 압력이 다시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3월에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비용 측면 물가 상방 압력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가장 큰 원인은 중동발 국제유가 폭등이다. 수입 에너지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경제 구조상, 유가 상승은 소비자물가로 전이되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여기에 달러강세에 따른 환율상승이 수입단가를 추가로 끌어올렸다. ‘환율발 물가 압력’까지 가세한 셈이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곡물과 원자재 가격이 동반 상승하며 외식 물가와 가공식품 가격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가 “내수 회복의 불씨가 꺼질 우려가 크다”고 진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는 결국 ‘가격통제’ 카드를 뽑았다.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이례적인 정책수단이다. 그만큼 물가비상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단 뜻이다.
지난 13일부터 시행된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격에 상한선(휘발유 L당 1724원, 경유 1713원)을 두는 제도다. 1997년 가격 자유화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가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한 것이다.
정부는 유가 상승의 충격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2주간 시범 운영 후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정유사의 영업 손실분을 정부가 보전해주기로 하면서까지 시행을 강행했다. 기름값이 물가심리를 자극해 전방위적인 물가인상사태로 번지는 사태를 막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유류세 인하카드와 4월 추경 대기 = 최고가격제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정부는 ‘공급 물량 확대’와 ‘세금 감면’이라는 투트랙 전략을 병행한다. 우선 국제에너지기구(IEA) 회원국들과 공조하여 2246만 배럴의 전략비축유를 순차적으로 방출한다. 시중에 기름 공급을 늘려 가격 하락을 유도하겠다는 계산이다.
또 현재 시행 중인 유류세 한시적 인하 조치를 더 강화할 준비를 마쳤다. 현재 휘발유 7%, 경유 10% 수준인 인하 폭을 법정 최대치인 37%까지 확대하는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37% 인하가 적용될 경우 휘발유는 리터당 약 303원, 경유는 214원의 인하 효과가 발생한다. 소비자들의 체감 물가를 직접적으로 낮추는 대책이다.
정부는 가격 억제책과 더불어 취약계층 ‘직접지원’을 위해 15조~20조원 규모의 4월 추경 편성을 공식화했다. 이번 추경의 핵심은 ‘타깃형 지원’이다. 고유가로 고통받는 화물차 운송업자, 택배 기사, 농어민들에게 유가 보조금을 추가 지급한다. 소상공인들에게는 지역화폐 발행 지원을 통해 매출 증대를 돕는다는 구상이다.
특히 1월 관리재정수지가 11조3000억원 흑자를 기록하며 세수 여건이 양호하다는 점은 그나마 추경 편성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정부는 추가 국채발행 없이 초과세수와 세계잉여금을 활용할 계획이다. ‘나랏빚’을 최소화하면서 민생자금을 적기에 투입하겠다는 ‘착한 추경’의 논리를 펴고 있다.
◆물가 괜찮을까 = 향후 물가 향방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신중론이 교차한다. 낙관론의 근거는 이렇다. 정부의 강력한 가격통제와 비축유 방출, 추경 등을 통한 지원이 4월부터 본격화되면 물가 상승세가 둔화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반도체 수출 호조에 따른 경상수지 흑자가 환율을 안정시킬 경우, 수입 물가 압력도 점차 낮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신중론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란 전망에 기초하고 있다. 중동 분쟁이 전면전으로 치닫거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공급망 마비 사태가 길어지면 정부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기후 위기에 따른 식품 가격 상승(에그플레이션)은 재정 투입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로선 신중론(3%대 이상 물가상승 불가피)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상반기 한국 경제의 성패는 결국 ‘물가’에 달려 있다. 물가가 잡히지 않으면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시점은 늦춰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 가계부채 부담 증가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정부가 30년 만에 최고가격제와 속도전 방식의 추경을 선택한 것은 상황의 엄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고물가의 파고를 넘어야 하는 ‘고난도 방정식’을 정부가 어떻게 풀어낼지 주목된다. 향후 4월 추경안의 국회 통과 과정과 국제 유가의 추이가 상반기 민생 경제의 향방을 결정지을 최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