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매화보다 먼저 피는 변산바람꽃

2026-03-24 13:00:01 게재

영화 ‘변산’에는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다”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카메라가 잡은 앵글이나 줄거리를 쫓다 보면 ‘과연 그러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의 고향이고 지금도 그곳에 외가를 둔 필자는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파도가 긴 시간을 들여 층층이 깎아 만든 채석강 해안절벽을 보고 휘둥그레진 눈이 내변산의 웅숭깊은 숲과 계곡에서 한 번 더 놀라는 곳이 변산이다. 가난할지는 모르겠으나 노을 말고도 보여줄 것은 이곳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느른한 여름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솔가리를 흔들어 피리소리를 내는 원두막에 서서 서해를 바라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문풍지를 때리는 눈바람에 들창문을 열고 이른 새벽을 맞은 적이 있는가? 이는 어린 필자가 변산 외가에 머무는 동안 겪은 일이다.

변산은 산과 바다가 너나들이로 접한 곳이다. 어디를 가도 바다가 보이고 산이 둘러섰다. 그 덕분에 한반도의 서쪽 무릎께 자리한 이곳은 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에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고루 받아 다양한 식물이 분포한다. 제주에 사는 호랑가시나무가 바다를 건너 변산에 이르고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미선나무도 이곳에서 자란다.

추울 때에도 피는 꽃을 피울 수 있는 까닭은

변산을 대표하는 지표종 식물인 변산바람꽃은 내변산 청림마을에 군락을 이루어 2월 중순부터 꽃을 피운다. 푸른숲(靑林)을 닮아 얼핏 푸른빛이 도는 변산바람꽃은 활짝 꽃을 피우다 며칠 뒤면 그야말로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

이른 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매화나 산수유처럼 변산바람꽃도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한반도에서만 자생하는 이 식물은 심지어 눈을 뚫고 꽃대를 내밀기도 한다. 소복이 쌓인 눈은 차라리 이불 같아서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밤의 추위를 견디게 돕는다. 다행이다.

설이 갓 지난 후에 피어도 꽃은 꽃이기에 어쨌든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바로 대를 잇는 일이다. 미처 꿀벌도 나타나지 않은 시기에 이 식물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 수분할까? 아마 딱정벌레같은 곤충들일 것이지만 아직 확실치 않다. 근연종을 연구한 중국 식물학자가 이 계통의 식물에서 꿀샘의 존재를 보고한 결과를 보면 분명 매개 곤충이 있기는 할 것같다.

‘꽃 오븐(oven)’이라는 비유를 써가며 독일 과학자들은 이른 시기에 꽃을 피우는 몇 종류의 식물이 열을 내는 분자기구를 진화시켰다고 말한다. 일본과 유럽에 서식하는 변산바람꽃의 근연종과 복수초 같은 식물이 여기에 속한다. 눈 속에서 노란 꽃을 내민 복수초의 꽃잎 온도는 바깥 기온보다 몇 도씩 높다. 두꺼운 잎의 둥근 공간에 자리잡은 꽃에서, 열을 내어 수분을 돕는 딱정벌레의 온기를 지켜주는 ‘앉은부채’도 추울 때 번식을 시도하는 용감한 식물 가운데 하나이다.

시베리아에 사는 동물이나 갓 태어난 인간의 아이는 몸에 열을 내는 갈색지방을 듬뿍 지닌다. 세포 발전소 역할을 맡은 갈색지방 세포의 미토콘드리아는 영양소를 곧바로 태워버린다. 몸 안에 고성능 핫팩(hot pack)이 여러 벌 든 셈이다. 몸집을 키워 체열의 발산을 줄이거나 난방장치의 도움을 얻어 우리는 삼동(三冬)을 난다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정온동물이다.

그러므로 이런 식의 용어를 쓸 수 있다면 변산바람꽃이나 복수초는 정온식물이다. 연꽃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식물도 마찬가지다. 겨울 지나자마자 정온식물이 꽃을 피우는 까닭은 바로 이런 생물학적 무모함 덕분이다.

광합성 공간인 푸른 잎보다 생식기관인 꽃을 먼저 피우는 전략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돈 벌 요량보다 지갑에 든 돈을 허투루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되도록 화려한 꽃을 피워 곤충을 부르고 배고픈 이들에게 적은 양일망정 꿀도 제공해야 한다.

일찍 핀 꽃은 곳간을 탈탈 털어 몇 안 되는 곤충을 목놓아 불러야 한다. 그렇게 간신히 수분을 마치면 이젠 녹색 잎으로 사력을 다해 광합성을 하고 씨를 성숙시켜야 한다. 4월이면 변산바람꽃은 자신의 생애를 갈무리한다. 대부분의 속씨식물이 떡잎을 틔우고 막 몸집을 키우기 시작할 때다.

추울 때 꽃 피우는 전략이 시공간 확장시켜

다른 식물과 겹치지 않는 시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생활사를 완결하려면 식물은 생식기관 주변의 세포 안 미토콘드리아에서 생물학적 시간차 전략을 정밀하게 구사해야 한다.

빛을 모아 어렵게 확보한 영양소를 에너지로 쓰는 대신 열로 치환하는 전략은 동물이나 식물이 더 추운 곳으로 삶의 공간을 확장하거나 더 추운 시기에 삶의 역량을 집중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렇게 생명은 시간과 공간을 넓힌다. 변산바람꽃이 생명의 시간을 앞당겼듯이.

김홍표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