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에너지시스템 리디자인, 성패는 수요를 움직이는 데 달렸다
에너지전환은 단지 발전원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에너지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저탄소 전원을 확대하고, 전기차와 히트펌프 보급을 늘리며, 산업의 전기화와 수소 기반 전환을 추진하는 방향 자체는 분명하다.
그러나 전환이 진전될수록 전력 문제는 더 이상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제는 전기를 언제 얼마나 어디서 쓰도록 유도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은 자연조건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고, 전기차 충전과 히트펌프 난방 수요는 특정 시간대에 집중된다. 결국 전력시스템의 부담은 총수요의 크기 자체보다 시간과 지역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엇갈리는 데서 더 크게 발생한다.
그동안 우리 에너지정책은 주로 인프라 확충에 초점을 맞춰 왔다. 발전설비를 더 짓고, 송전망과 에너지저장장치를 확충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런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전력망 역시 사실상 외부와 연결되지 않은 섬과 같은 구조다. 여기에 국토 제약과 주민 수용성 문제까지 감안하면 대규모 전력 인프라를 계속 확장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화가 본격화될수록수급 불균형 문제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모두 발전소 전력망 저장장치 증설로만 해결하려는 접근은 결국 전력 공급 비용을 더욱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
수요 유연성으로 전력시스템 효율 30% 증가
이런 조건에서 주목해야 할 대안이 수요 유연성이다. 전기차 충전, 냉난방, 건물설비, 일부 산업 공정처럼 시간 조정이 가능한 수요를 전력망에 여유가 있거나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시간대로 옮기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크시간대의 부담을 줄이고, 값비싼 발전기 추가 가동을 억제하며, 이미 갖춰진 발전기와 전력망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수요 유연성은 전력시스템 효율을 최대 30% 높일 수 있으며, 신규 공급설비보다 최대 3배 낮은 비용으로 필요한 유연성과 용량을 제공할 수 있다. 또 2050년까지 전세계적으로 약 1조8000억달러 규모의 전력망 투자 부담을 늦추거나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수요를 조금만 옮겨도 효과는 결코 작지 않다. 스페인에서는 겨울철 저녁 피크구간 수요의 1.7%만 다른 시간대로 옮겨도 전체 시스템 비용이 3.4%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긴급 상황에서 5분 만에 2100MW 이상의 수요를 줄여 순환정전을 피했다. 이는 전력을 더 생산하지 않고도 수요를 조금만 조정하면 시스템 안정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재생에너지 변동성 대응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재생에너지 발전이 많은 시간대로 수요를 옮기면 출력제한을 줄일 수 있고, 공급이 부족하거나 계통이 혼잡한 시간에는 소비를 줄여 화석연료 의존과 계통 부담을 함께 낮출 수 있다.
이 문제는 한국에서 더욱 중요하다. 2024년 9월 한국의 피크수요는 2017년보다 15% 증가했지만 일평균 수요 증가는 9%에 그쳤다. 피크시간도 오후 4시에서 7시로 늦어졌다. 총수요보다 피크수요가 더 빠르게 늘고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차, 히트펌프 보급이 본격화되면 이런 부담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그때마다 발전소와 저장장치, 전력망을 계속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비용 부담이 너무 크다. 특히 계통혼잡이 심한 지역에서는 지역별 가격신호와 유연성 자원 활용을 통해 송배전 투자 부담을 줄이는 접근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출발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한국전력은 수요반응 제도를 확대하고, 계시별 전기요금 체계도 보다 정교하게 손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요금 조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가격신호가 실제 행동변화로 이어지려면 스마트미터, 자동제어 인프라, 전기차 스마트충전, 건물에너지관리시스템, 예측가능한 보상체계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아울러 더 많은 소비자가 손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 설계도 한층 정교해져야 한다.
전기를 필요한 시간에 똑똑히 쓰는 능력 중요
에너지전환의 성패는 결국 수요를 얼마나 잘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재생에너지 변동성과 피크수요 확대, 전력망 제약이 동시에 커지는 시대에 발전소와 저장장치, 송전망만 계속 늘리는 방식은 점점 더 비싸고 어려운 해법이 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전기를 더 많이 생산하는 능력만이 아니다. 전기를 필요한 시간에 더 똑똑하게 쓰게 만드는 능력이다. 수요 유연성은 부차적인 보완책이 아니다. 전력 공급 비용을 낮추고 에너지안보를 높이며 탄소중립을 현실로 만드는 핵심 전략이다.
고려대 에너지환경대학원 교수
융합에너지공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