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두루마리 논문, 영국 박물관 소장
AI 시대 감각·사유 탐구 … KAIST 이진준 교수 연구
KAIST(총장 이광형)는 문화기술대학원 이진준 교수의 옥스퍼드대학교 박사논문 ‘빈정원(Empty Garden)’이 애쉬몰린 박물관에 정식 구입돼 영구 소장·전시된다고 27일 밝혔다.
일반적으로 박사논문은 책 형태로 제작되지만, 해당 논문은 길이 약 10m의 한지 두루마리 형식으로 제작됐다. 연구 결과와 형식을 결합한 사례로, 예술계와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애쉬몰린 박물관은 1683년 설립된 세계 최초의 대학 박물관으로, 루브르 박물관보다 약 110년 앞서 설립됐다. 이 기관이 생존 작가의 박사논문을 정식 구입해 영구 컬렉션에 포함한 사례는 이례적이다.
이번 성과는 국내에서 수행된 예술·학문 연구가 해외 공공 문화기관의 소장 대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구 결과가 장기적으로 보존·연구·전시되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논문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마음속에 그리던 ‘의원(意園)’ 개념을 현대 디지털 환경에서 재해석한 연구다. 인공지능과 데이터 중심 환경에서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췄다.
이 교수는 ‘데이터 가드닝(data gardening)’ 개념을 제시했다.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정원을 가꾸듯 시간을 들여 경험하고 해석하는 접근이다.
논문 형식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했다.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돼 독자가 이동하며 읽도록 설계됐으며, 동아시아 정원의 ‘거닐기’ 경험을 구현했다. 논문은 총 9개의 두루마리로 구성됐으며, 이 가운데 일부가 박물관에 소장된다.
해당 논문은 옥스퍼드대학교 순수미술 철학박사(DPhil) 심사에서 ‘수정 없음(No Corrections)’ 판정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학위 논문은 보들리언 도서관에 등록되지만, 이번 사례는 별도의 심의를 거쳐 박물관이 소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애쉬몰린 박물관 셸라 베인커 큐레이터는 “형식과 내용이 결합된 확장된 작업”이라며 “박물관 내 한국 현대 작가 작품으로는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감각과 경험이 약화될 수 있다”며 “몸으로 경험하고 사유하는 방식을 제안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어 “동양적 사유가 새로운 감각 체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옥스퍼드대학교 엑시터 칼리지 방문교수와 뉴욕대학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