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호르무즈 사태와 산업 안보의 재설계

2026-03-31 13:00:01 게재

미·이란 전쟁이 예상을 넘어 장기화되면서 세계경제에 하방 압력을 가하고 있다. 초기에는 유가 급등과 해상운임 상승이 직접적인 변수로 주목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원유 수급뿐 아니라 나프타, 산업용 가스, 황, 비료 원료, 정유제품처럼 산업 밑단을 떠받치는 품목까지 불안해지고 있다. 이제 그 여파는 기업의 비용 부담을 넘어 물가와 생산, 세계 교역의 흐름까지 바꾸고 있으며, 식량안보와 첨단산업 경쟁력까지 함께 시험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세계경제의 비용 구조와 공급망을 재편하는 공급충격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충격은 한국에 더욱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중동 리스크가 제조업의 기초체력을 떠받치는 산업투입재 전반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프타와 LNG 등 화학 원료의 조달 차질은 석유화학 산업의 생산 병목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플라스틱, 합성섬유, 자동차부품, 가전용 내외장재 등 전방 산업으로 파급된다. 여기에 반도체·배터리 공정용 헬륨과 정밀화학 원료의 수급 불안까지 더해지며, 이번 전쟁은 AI와 첨단산업 공급망의 취약성까지 드러내고 있다. 우리 경제의 약점은 원유 의존 자체보다, 에너지와 산업원재료가 복합적으로 얽힌 제조업 투입구조의 대외 의존성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한국에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중동 리스크

일본은 중동 원유 의존도가 한국보다 더 높지만, 해외자원 지분투자, 전략비축, LNG 조달 다변화를 통해 충격을 흡수할 체계가 잘 갖춰져 있다. 유럽연합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에너지 위기를 거치며 LNG 터미널 확충, 에너지 절감, 재생에너지 확대를 통해 제도적 대응력을 높여왔다.

반면 대만은 섬 경제의 제약 속에서 전력과 LNG 병목이 산업 경쟁력과 곧바로 연결되고, 반도체 중심 구조 탓에 전력망 안정과 첨단 공정용 소재 확보의 부담이 더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같은 중동 충격이라도 일본과 유럽은 상대적으로 완충 장치가 더 잘 마련돼 있는 반면, 한국과 대만은 제조업과 산업원재료 측면에서 보다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중국도 물류비 상승과 세계 수요 둔화의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일부 석유화학 중간재와 금속 가공소재에서는 대체 공급자로서 움직일 여지가 있다. 러시아는 에너지와 비료, 일부 금속 가격 상승에 따른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통상정책도 과거의 문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순히 시장을 넓히고 관세를 낮추는 전략만으로는 부족하다. 에너지 조달의 안정성 확보, 전략품목의 비축, 산업원재료의 확보 기반 강화, 그리고 우방국과의 긴밀한 공급망 협력이 통상정책의 핵심 의제로 통합돼야 한다. 특히 중동 의존도를 완화하는 과정에서 한·미 협력은 단순한 에너지 매입을 넘어 미래지향적 산업 안보 파트너십으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 LNG 도입 다변화와 원전·핵연료 공급망, 에너지 인프라 투자까지 포괄하는 다층적 협력은 에너지 안보와 산업 안보를 함께 보강하는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향후 대미 투자는 관세를 피하기 위한 비용이 아니라, 공급망 안정과 산업거점 확보를 위한 전략적 투자로 설계돼야 한다.

외부 충격에 오래 버티는 산업기반 구축

지정학적 리스크가 일상이 된 시대에 한국의 경쟁력은 더 많은 수출보다, 외부 충격에도 오래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산업 기반에서 나와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