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수요 없으면 기술은 실험실에서 죽는다

2026-04-01 13:00:01 게재

혁신정책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프라운호퍼 연구소의 야콥 에들러는 “혁신의 확산은 공급만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특정 산업 이야기가 아니다. 혁신 일반론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은 한국 농업 연구개발(R&D)의 현실을 정확히 설명한다.

한국은 농업 R&D에 연간 1조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한다. 농촌진흥청만 해도 2026년 기준 6238억원을 R&D에 쓴다. 산림청과 농식품부 사업까지 합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숫자만 보면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성과를 묻는 순간 답은 흐려진다. 논문과 특허는 쌓이고 기술시연회도 매년 열린다. 하지만 그 기술로 시장에서 매출을 올리며 자생하는 민간기업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는 연구 성과가 산업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종자산업이 이를 잘 보여준다. 국내 민간 종자시장 규모는 6757억원으로 세계 시장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종자업체 2143개 중 91.6%가 연 매출 5억원 미만이며, 실제 육종 실적이 있는 기업은 13.5%에 그친다. 나머지 대부분은 해외 종자를 유통하는 데 머문다. 결국 산업이라기보다 유통구조에 가깝다.

글로벌 기업 바이엘이 연간 2조원을 R&D에 투자하는 동안 한국 종자업계 전체 투자액은 595억원에 불과하다. 농기계 스마트팜 농업 미생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기술은 만들어지지만 시장에서 돈을 버는 구조는 형성되지 않는다.

지금 기업에 필요한 것은 보호 아닌 시장

문제는 기술력이 아니다. 한국 농업 연구자들의 역량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핵심은 기술이 자라야 할 ‘시장’이 없다는 점이다.

에들러의 말을 한국 농업에 대입하면 악순환의 구조가 드러난다. 소농 중심의 영세구조로 인해 농가는 기술 서비스 비용을 지불하기 어렵다. 비용을 낼 수 없으니 정부가 대신 보조한다. 정부가 시장을 대체하면 가격신호가 사라져 민간 서비스 시장은 형성되지 않는다. 시장이 없으니 기업은 정부 과제 수주 자체를 사업 모델로 삼는다. 연구는 시장 수요와 분리되고, 기술은 실용화되지 못한 채 축적된다. 이 구조가 종자 농기계 스마트농업 전반에서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이 악순환이 더는 버틸 수 없는 구조가 됐다는 점이다. 세계 농업은 로봇과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술 전환기에 진입하고 있다. 이 전환에 올라타려면 민간기업의 투자 여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농업 후방산업은 악순환 속에서 이미 체력을 잃었다. 투자할 여력이 없으니 남는 선택지는 외국 기술의 수입뿐이다. 식량의 70%를 해외에 의존하는 나라가 농업기술까지 외국 기업에 맡기게 되면 이는 더 이상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스타트업 육성 정책조차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포장한다. 그러나 기업에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시장이다.

이 악순환을 끊은 사례는 분명히 존재한다. 네덜란드는 1990년대 공공 농업지도사업을 민영화하며 농가가 컨설팅 비용을 직접 지불하도록 전환했다. 비용을 지불하는 고객이 생기자 민간 컨설팅 기업이 등장했고, 이 기업들이 대학과 연구기관에 기술을 의뢰하는 선순환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세계 2위 농산물 수출국으로 성장했고, 글로벌 종자기업과 농업기술 기업들이 탄생했다.

이스라엘은 내수시장이 작지만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 어그테크(AgTech) 스타트업이 500개 이상 존재한다. 정부는 초기 지원에 그치고 이후의 생존과 성장은 시장에 맡겼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정부가 기술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술이 살아남을 시장을 먼저 만들었다는 점이다.

정부가 시장 역할 대신해선 안돼

물론 한국 농업의 구조는 네덜란드나 이스라엘과 다르다. 그러나 원리는 같다. 정부는 시장을 대신해서는 안된다. 시장을 만드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농가 규모를 키워 기술 서비스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경영체를 육성하고, 공공 농업지도사업을 단계적으로 민간에 이양하며, 농가가 민간 기술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도록 기술 바우처를 도입해야 한다. 기술을 무상으로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거래되는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공공 보조금으로 스마트팜 설치를 늘리는 것은 단기적 성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유지·개선·확산을 담당할 민간 생태계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국 농업이 정체된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술을 사줄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매년 1조원을 투입하면서도 시장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이 악순환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만약 정부가 스마트폰을 직접 만들어 보급하는 방식에 머물렀다면, 오늘의 삼성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