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보수는 극우로 뭉치고, 진보는 갈라지는 영국 정치
영국은 대표적인 양당제 국가다. 창당 190년이 넘은 보수당과 20세기 초 노동자 권익을 위해 지식인들이 만든 노동당이 2차대전 후 번갈아 가며 집권했다. 소선거구제가 양당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이런 영국이 점차 다당제 국가로 변모중이다. 다당제는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익을 대변할 수 있어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럼에도 영국의 정치변화와 맞물려 다당제가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더 높여주고 있다.
35세 배관공 당선이 부른 녹색당 돌풍
지난 2월 26일 영국 북부의 맨체스터 시 보궐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2차대전 후 줄곳 노동당의 아성이었던 고튼앤덴튼 선거구에서 신생 녹색당 후보가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금배지를 단 35살의 한나 스펜서는 배관공으로 일해오다 3년전 구의회 의원이 됐다. 그는 승리가 확정된 후 “저는 배관공입니다. 정치인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제 몫을 받지 못하고 이들의 노동이 다른 사람들을 부자로 만드는 것을 혐오합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다음 총선에서 ‘녹색당의 물결’이 노동당을 대체할 것입니다”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 보궐선거에서 녹색당은 41%를 얻어지난번 선거보다 무려 27%p나 지지율이 올랐다.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 영국개혁당은 29%로 2위를 차지했다. 개혁당과 급진좌파 녹색당이 유권자들로부터 2/3가 넘는 지지를 얻었다. 제1야당 보수당은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상당수의 노동당 지지자들이 녹색당으로, 보수당 지지자들은 개혁당으로 옮겨 갔다.
보궐선거 승리 후 녹색당의 신규 당원은 3배나 늘어 3월 말 기준으로 22만명을 돌파했다. 개혁당은 27만명 정도다. 유거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31일을 기준으로 녹색당 지지도는 19%로 2위를 차지했다. 1위의 개혁당에 비해 5%p 차이지만 꾸준하게 상승세를 타고 있다. 작년 9월에 녹색당 당수가 된 잭 폴란스키의 리더십이 녹색당의 세력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환경 포퓰리즘’(Eco-populism)을 제시했다.
기후위기를 가난한 사람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사회정의적 이슈로 보면서 급진적 환경주의를 재분배와 연계했다. 집권하면 부유세를 최우선 과제로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부동산과 주식 등에 대해 거액의 세금을 부과하고 이를 불평등 해소에 쓰겠다는 것이다. 1000만 파운드, 즉 200억원 이상의 자산 보유자에 대해 연간 1%, 10만 파운드의 세금을 부과할 계획이다.
영국개혁당은 녹색당보다 먼저 돌풍을 일으켰다. 시작은 영국의 유럽연합(EU)탈퇴(브렉시트)였다. 2016년 6월 23일 영국 유권자들은 3.8%p 차이로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그때 선거에서 EU탈퇴 찬성을 주도한 사람이 영국개혁당 당수 나이젤 패라지이다. 그는 ‘영국의 트럼프’라 불린다. 작년 5월부터 집권 여당 노동당을 지지도에서 앞서기 시작하더니 거의 10개월 간 8~10%p 차이를 유지중이다.
2024년 7월 4일 총선에서 개혁당은 변변한 지역구를 갖추지도 못했지만 3위의 정당 지지율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하원에서 5석을 확보했다. 이후 보수당의 지지도가 계속해서 급락하자 보수당 의원들이 대규모로 개혁당에 입당했다. 지난 1월 중순에는 보수당 차기 당수로 유력하던 로버트 젠릭(Robert Jenrick)마저 개혁당으로 이적했다. 총선 후 지금까지 최소 10명이 넘는 보수당의 중진 의원들과 전 장관들이 개혁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650석의 하원 의석 가운데 개혁당은 현재 8석에 불과하다. 더 많은 보수당 의원들이 침몰하는 당을 버리고 개혁당으로 이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기에 다음달 7일 지방선거 이후에는 더 이상 보수당 의원들을 당원으로 받지 않겠다고 패라지가 발표했을 정도다.
보수 일간지 데일리 텔리그래프와 데일리 메일 등이 나서서 개혁당을 중심으로 보수가 결집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래야 2029년에 치러질 차기 총선에서 보수진영이 집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변모중인 정치지형을 생각하면 신생 개혁당이 196년 된 보수당을 제치고 실질적으로 제1야당이 되고 있다는 게 과장이 아니다.
극우개혁당과 녹색당의 ‘적대적 공생’
개혁당과 녹색당은 정책에서 극과 극을 달리지만 포퓰리스트 정당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맨체스터 보궐선거에서 녹색당은 이슬람 이민자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패라지는 이를 ‘영국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며 인종주의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집권하면 60만명의 불법 이민자들을 추방하겠다는 공약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개혁당은 기후위기를 사기라고 규정하지만 녹색당은 급진적인 환경론자들이다. 당수의 성향도 매우 다르다. 녹색당의 폴란스키 총재는 예순이 넘은 패라지를 ‘파시스트’라 부른다. 패라지는 40대 중반의 녹색당 당수를 ‘미치광이’라 맞받아친다.
반면 두 정당 모두 노동당과 보수당이 80년 넘게 구축해 온 양당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 녹색당이나 개혁당이 집권해야 파시스트나 미치광이의 집권을 막을 수 있다고 두 정당은 강조한다. 나이젤 패라지가 총리가 되려면 녹색당이 노동당 지지자들의 표를 많이 빼앗아와야 가능하다. 그래야 선거구에서 한명의 하원의원만 뽑는 소선거구제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맨체스터 보궐선거에서 보듯이 집권당의 정책에 실망한 많은 노동당 지지자들이 녹색당으로 돌아섰다.
실제로 설문조사업체 ‘모어 인코먼’(More in Common)이 작년말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층과 여성, 소수인종이 중도좌파 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 자유민주당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 반면에 고령층,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백인 남성들은 보수당이나 개혁당 지지세가 높다.
EU 회귀 시도와 계속된 진보진영의 분열
이처럼 급변중인 정치지형 때문에 집권한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지지도에서 3위로 추락한 노동당에게 비상이 걸렸다. 집권 후 1% 안팎의 낮은 경제성장률에 물가를 훨씬 밑도는 임금상승률 때문에 여러 유권자가 집권당으로부터 빠르게 등을 돌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영국의 올해 경제 성장률을 0.7%로 하향 조정했다. 주요 20개국(G20) 회원국 가운데 하향폭이 제일 컸고 작년 12월보다 0.5%p나 깎였다. 물가상승률도 4%로 1.5%p나 오를 것으로 수정 전망됐다. 에너지 및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아 물가가 크게 오른다. 경제성장률 제고를 주요 공약으로 내건 노동당에게 악재다.
곤혹스러운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총리는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EU와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트럼프행정부가 야기한 위험한 세계를 함께 헤쳐나가는데 유럽연합이 필요하다”며 “가치와 이익, 미래를 공유하는 EU와 더 긴밀한 경제 및 안보 관계를 맺겠다”고 밝혔다.
총리는 브렉시트 강성 지지자들이 포진한 보수당과 개혁당을 의식해 이제까지 좁은 분야에서만 한정해 EU와의 관계 개선을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틀을 벗어나 협력 분야의 확대와 강화를 강조했다. 개혁당 녹색당에 이어 지지율이 3위에 불과한 집권당으로서는 경제성장에 매진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영국 교역의 절반 정도가 가는 가장 큰 시장 EU가 더욱더 필요하다.
노동당의 지지율은 18% 정도로 정체했고 유사한 진보 진영의 자유민주당도 12% 안팎으로 정체돼 있다. 많은 정치 평론가들은 진보진영이 계속해서 분열되고 보수가 개혁당을 중심으로 합쳐진다면 패라지가 총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진단해왔다. 아직 총선이 3년 넘게 남았지만 진보진영의 연대는 정책 간 차이가 크고 연립정부나 선거연합의 전통이 거의 없기 때문에 쉽지 않다.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