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효율’ 아닌 ‘회복력’ 시대가 왔다

2026-04-13 00:00:00 게재

미국과 이란 간 첫 종전협상이 아무런 합의도 없는 ‘노딜’로 끝남에 따라 향후 중동지역 정세가 불투명해졌다. 양측이 재협상 여지를 남겨놓기는 했지만 2주일간의 휴전 기간 내에 타결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란의 핵 개발 포기 등 핵심 쟁점을 놓고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서다.

설령 전쟁이 끝나더라도 석유를 비롯한 주요 원자재의 공급망이 전쟁 이전 상태로 쉽사리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많은 전문가의 진단이다. 전쟁 기간 중 파괴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국가들의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 설비가 완전 복구되기까지 최장 5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위기 상황에 취약한 한국 경제 생태계 민낯 드러나

한국이 원유와 나프타 등 주요 원자재의 70% 이상을 수송 항로로 의존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이번 전쟁 기간 중 봉쇄되면서 빚어진 일대 혼란이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리스크다. 전쟁으로 주요 기반시설이 파괴된 이란이 복구 비용 조달을 이유로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 징수를 상시 제도화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 모든 리스크와 비용이 에너지(원유·천연가스·LNG)와 제조업 필수 원자재(나프타·헬륨 등)를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을 직격할 게 분명하다. 한국 산업계는 이번 전쟁 기간 중 공급망 교란으로 인한 충격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뼈아프게 경험했다. 롯데케미칼이 여수공장 전체 생산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LG화학도 여수산업단지 내 나프타분해시설(NCC) 2공장 가동을 멈추는 등 산업 현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나프타 기반의 에틸렌과 프로필렌을 주성분으로 하는 혼화제 수급 차질로 레미콘 생산이 중단되면서 건설 현장까지 영향을 받았다.

반도체업계는 헬륨 등 주요 소재의 공급에 비상이 걸리면서 심각한 몸살을 앓았다. 반도체 핵심 공정에 쓰이는 원료인 헬륨은 전체의 약 50% 이상이 카타르에서 공급되고 있는데, 이란이 카타르의 액화천연가스(LNG) 생산시설인 라스라판 산업단지를 공격하면서 가스생산 시 부산물로 추출되는 헬륨 생산도 함께 중단된 탓이다.

이번 전쟁은 세계적인 농업 및 식량위기 경고로까지 이어졌다. 가장 널리 쓰이는 질소 비료의 원료인 요소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페르시아만에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세계 요소 수출량의 약 1/3이 호르무즈를 통과해야 하며, 인산 비료 원료인 황의 45%도 이곳을 통해 수출된다. 액화천연가스(LNG)를 이용해 요소를 만드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의 비료 공장도 잇따라 가동을 중단했다. LNG 수입량 대부분을 중동에 의존해온 탓이다. 비료용 요소의 절반 가까이를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도 피해를 고스란히 겪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달 중동 지역 요소 수출 가격이 t당 670달러로 전월 대비 38.1% 올랐으며, 작년보다 172.3% 상승했다.

이번 중동전쟁은 한국의 글로벌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세계 성장률 전망치를 2.9%로 유지한 가운데 한국에 대해서만 1.7%로 기존 전망치(2.1%)보다 0.4%p나 하향 조정하면서 ‘위기 상황에 취약한 경제 생태계’를 그 이유로 들었다.

한국의 공급망 취약성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부도 위험 지표’로 꼽히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시세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란과 전쟁을 벌인 이스라엘과 인접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CDS 프리미엄은 오히려 하락한 반면 한국은 한달 새 33%나 급등했다. 원·달러환율이 1500원을 넘어섰던 것도 한국의 이런 경제 취약성을 반영했다. 핵심 에너지와 주요 원자재 공급망을 특정 지역과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해 대외 충격에 즉각적이고도 민감한 영향을 받게 된 탓이다.

넓은 시야와 긴 안목으로 공급망 재구축을

우리나라가 이렇게 편중된 공급망 구조를 갖춘 것은 단기간 내 고도성장을 뒷받침할 ‘효율 제일주의’를 추구해 온 결과다. 덕분에 빠른 성장 가도를 달려왔지만, '계산대’ 앞에 선 셈이다. 수송과 생산 효율 등을 이유로 석유·가스와 주요 석유화학 원자재를 특정 지역에 ‘몰빵’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가 드러났다. 에너지와 원료의 안정적 확보는 경제 생태계의 원활한 작동은 물론, 인공지능(AI) 시대 한국의 강점으로 떠오른 제조업 기반 유지와 강화를 위해서도 불가결한 과제다. 보다 넓은 시야와 긴 안목으로 공급망 재구축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