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칼럼
K-바이오허브, 본질은 외형 아닌 연구와 자본의 밀도
흔히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고전적인 논쟁을 즐기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바이오산업에선 정답이 명확하다. 닭이 먼저다. 여기서 닭은 우수한 연구인력과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숨쉬는 생태계를 의미하며, 달걀은 그 결과물인 신약과 사업화 성과를 뜻한다. 닭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사육 환경, 즉 생태계(허브)가 제대로 갖춰져야 비로소 황금알을 기대할 수 있다.
그동안 정부와 지자체는 ‘K-바이오허브’란 이름으로 보스턴 모델을 이식하는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보스턴의 본질과 한국의 현실 사이에는 여전히 거대한 인식의 격차가 존재한다. 우리는 지금 황금알을 낳는 혁신의 주체를 키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그들을 모아둘 ‘물리적 공간’을 짓는데 매몰되어 있는 것인가.
보스턴 모델 겉모습 아닌 내용 배워야
미국 보스턴의 캔달스퀘어는 과거 우범지대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1마일’로 탈바꿈했다. 이 기적의 이면에는 정책적 열망과 리더십에 따른 철저하게 계산된 생태계 설계가 있었다. 2007년 패트릭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호크필드 MIT 총장은 서부 실리콘밸리의 IT 성장과 암젠·길리어드 등 바이오 벤처의 약진에 자극받아 동부의 새로운 바이오 붐을 꿈꿨다.
이들은 뉴저지 중심의 전통 제약산업 한계를 넘어 하버드와 MIT의 인재, 그리고 탄탄한 병원 네트워크를 생명공학으로 결합했다. 특히 랩센트럴은 단순한 공유 오피스를 넘어 입주 기업이 대형제약사 병원 투자자와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교류하는 ‘핫풀’로 기능하며 혁신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 연구 역량과 시장 자본이 맞물려 혁신의 불꽃을 일으키는 임계점이 형성되었다. 실제로 보스턴의 자본 농도는 압도적이다. 2022년 보스턴에 투입된 미국 국립보건원(NIH) 펀딩 등 정부 R&D 예산은 약 32억달러였으나, 같은 기간 유입된 벤처캐피탈(VC) 등 민간자본은 그 4배를 상회하는 136억달러(약 18조6000억원)에 달했다. 정부 지원이 혁신의 물꼬를 트는 사이 민간자본이 강력한 엔진 역할을 하며 생태계를 키워낸 셈이다.
당시 보스턴의 VC 투자액은 한국 전체 VC 투자 규모(약 7조7000억원)의 2배가 넘는 수준으로, 공공과 민간의 전략적 결합이 지닌 폭발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의 경우 2008년 최초의 바이오허브로 탄생한 첨단의료복합단지는 만성적인 구조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논리에 따른 자원 분산 결과다. 집중 투자가 생명인 허브를 오송과 대구로 나누면서 역량은 흩어졌고, 보스턴과 같은 임계 규모에 도달하지 못했다. 두 개 단지에 투입되는 연구 역량과 자본의 밀도에 대한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거버넌스의 경직성과 전문성 부재도 한계다. 보스턴 모델의 핵심은 민간의 유연함과 전문경영진의 안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천 송도에 구축 중인 ‘K-바이오랩허브’는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소속 변경이 논의되고 있다. 송도 생태계가 자생력 없이 행정 중심의 거버넌스로 편입된다면 사업 정체성은 모호해지고 혁신 동력은 형식적 절차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다.
세계적인 폐암 치료제인 유한양행 렉라자 후보물질을 개발해 보스턴에서 실력을 입증받은 제노스코가 기술성 평가 최고점을 받고도 코스닥 상장에 실패한 사례는 아이러니하다. 황금알을 낳아 본 글로벌 안목이 국내시장에선 사장되는 형국이다.
지역발전을 명분으로 한 인프라 구축 중심의 하드웨어 확충은 ‘무늬만 허브’라는 한계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젠 보스턴의 외형적 모방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생태계 작동원리에 집중해야 한다. 보스턴의 캠브리지이노베이션센터(CIC)가 스타트업 성장을 견인하고 매스바이오가 산·학·연·관의 가교로서 정책혁신을 주도하듯 단순한 물리적 집적을 넘어 입주주체 간 연구 역량을 유기적으로 결집하고 배가할 민간 주도 구심점과 오픈이노베이션식 협력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허브와 산업단지는 이 포인트로 구분된다.
자본밀도 획기적으로 높일 대책 절실
진정한 한국판 바이오허브 성공을 위해선 무엇보다 자본밀도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대책이 절실하다. 보스턴의 자금흐름에서 보듯 정부예산은 어디까지나 마중물이다. 정부 대비 일정 규모 이상의 민간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파격적인 금융·세제혜택과 인프라를 갖추고, 초기 벤처가 죽음의 계곡을 넘을 수 있도록 전문 투자그룹과 컴퍼니빌더를 적극 육성해야 한다.
나아가 자본흐름의 물꼬를 터줄 출구전략의 다양화가 시급하다. 특히 경직된 상장구조를 보완할 M&A 시장을 활성화해 투자자가 적기에 회수하고 재투자하는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민간자본은 수익의 불확실성이 아닌, 회수의 가시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외형을 넘어 혁신을 실행하는 K-바이오허브의 본질이다.
바이오산업은 긴 호흡이 필요한 인내의 영역이다. 지역 이해관계나 외형확장에 휘둘려선 한국판 보스턴은 요원하다. 이제는 기업·자본과 연합해 연구 성과를 글로벌 시장에서 황금알로 성숙시키는 건강한 생태계 육성에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