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석 칼럼
‘에너지 안보’는 시장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이 리터당 2000원을 넘었다. 중동에서 시작된 전쟁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감하는 순간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확인된 세계 질서는 이제 더욱 분명해졌다. 각자도생의 시대다. 어느덧 45일째 접어든 이번 전쟁은 멀리 떨어진 중동의 불안정이 한국 경제와 에너지 안보에 어떤 의미인지 다시 묻고 있다.
정부가 ‘최고가격제’나 ‘차량 5부제’ 등 고강도 정책으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계속되는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국제유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고, 그 부담은 가계와 기업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2주 간의 휴전 선언으로 포성은 잠시 멎었지만, 협상 타결은 쉽지 않고 시장의 불안은 여전하다.
아울러 미국이 중동을 떠난다 해도 호르무즈 해협으로 대표되는 중동의 불확실성은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미국의 불간섭이라는 새로운 국제 환경에서 ‘미국 없는 중동’은 한국의 에너지 안보에서 가장 불안한 고리로 남게 될 것이다. 화석 연료 시대의 종말이 이야기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석유의 시대 한가운데에 서 있다.
이번 중동전쟁은 석유시대의 석양이 얼마나 따가운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에너지원으로서의 석유를 넘어 비닐 플라스틱 비료 등 모든 석유화학 제품의 원료로서의 석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실감 나게 해주고 있다. 현대문명의 혈액인 석유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연료비 상승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화하고 있다.
중동산과 비중동산 비용차 보전 전면화
우리는 사용하는 석유의 70% 이상을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90%가 넘었던 것에 비하면 많이 낮아졌지만, 아직도 한국 경제는 중동의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오래된 숙제인 원유 도입선 다변화를 위해서는 중동 의존이 높은 원인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동은 상대적으로 가깝고, 빠르게 도착하며, 운송비가 적게 든다. 반대로 미주지역이나 대서양권 원유는 거리와 시간에서 불리하다. 높은 운임뿐만 아니라 재고 비용과 가격 변동 리스크까지 함께 져야 한다. 기업으로서는 중동산 원유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원유의 중동 의존은 시장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이다.
중동산 원유 의존을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정부 개입은 국가적 가치인 ‘에너지 안보’를 적절하게 시장가격에 반영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정책을 통해 중동산과 비중동산 원유 도입 비용의 차이를 없애면 중동 이외의 국가로부터의 원유 도입을 조장 또는 촉진할 수가 있다. 그 결과 기업이 다양한 국가로부터 원유를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에너지 안보’이고 국민 경제 발전이다.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안한다면 우선 비중동산 원유 도입 시 발생하는 추가 운송비와 금융비용을 보전하는 방법이다. 중동산 대비 추가 비용의 30%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보전해 주고 있는 현재의 지원 정책의 규모를 대폭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현재와 같은 석유수입부과금 환급이라는 소극적 형태의 행정이 아니라 ‘다변화 촉진 지원금’이라는 명분을 정면으로 내세우는 것도 꼭 필요하다.
다음으로 ‘원유 유연성 투자’에 대한 지원이다. ‘원유 유연성 투자’는 특정 지역의 원유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성상의 원유를 경제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설비 역량을 확보하는 투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설비가 특정 원유에 최적화되어 있으면 도입선 다변화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이러한 투자에 대해서는 정책금융, 세제지원, 그리고 성과 연계 인센티브 형태로 지원하는 정책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운송비 지원이 단기처방이라면, 유연성 투자는 구조개혁이다.
시장구조 바꾸는 정책설계 필요
‘에너지 안보’는 시장이 자동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시장은 가장 경제적으로 선택할 뿐이다. 국가의 위험을 줄이는 선택은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을 국가가 보전함으로써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는 것이 정책이다. 중동을 대체하자는 구호가 아니라, 시장구조를 바꾸는 정책설계가 필요하다.
이번 전쟁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 없이는 ‘에너지 안보’를 담보할 수 없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에너지 안보’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정책 당국의 철저한 준비와 실용적이고도 과감한 정책 집행을 기대한다.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