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1973년이 보낸 경고, 정치권 듣고 있나
미-이란 첫 종전협상이 ‘노딜’로 끝났다.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승전 서사를 안고 협상장에 들어갔다. 미국은 핵시설 파괴와 이란 최고지도부 제거를 근거로 ‘이란은 이미 정복당했으며 협상이 되든 안 되든 자신들이 이겼다’는 인식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란은 호르무즈 봉쇄와 고유가를 지렛대 삼아 ‘미국이 먼저 협상을 요청해 왔다’는 사실상 승리자라는 자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항복문서’를 기대한 쪽과 ‘승리 확인서’를 요구한 쪽이 마주한 협상은 21시간 동안 각자에게 유리한 최종안을 일방 통보한 채 끝날 수밖에 없었다. 결렬의 후폭풍은 곧바로 위기고조로 이어졌다.
휴전이 끝이 아니라 ‘경제전’의 시작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 결렬 직후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했다. 개전 이후 이어져 온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에 맞선 ‘역봉쇄’이자 이란의 원유수출과 외부물자 조달을 동시에 차단하려는 사실상의 대이란 해상봉쇄다. 닷새 전 합의된 2주 휴전은 풍전등화 신세가 됐다. 이번 결렬은 ‘전쟁의 끝’이 아니라 ‘더 길고 비싼 경제전’을 예고하는 신호다.
1973년 4차 중동전쟁과 오일쇼크는 총성이 멎었다고 해서 석유전쟁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냉정한 교훈을 남겼다. 그때도 휴전 이후 감산·금수조치가 본격화하면서 유가는 3달러에서 12달러로 4배 뛰었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은 두자릿수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친 스태그플레이션 늪에 빠졌고, 전후 30년간 이어져 온 고도성장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자고 나면 물가가 오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잃어버린 10년’을 감내해야 했다. 군사적 승패와 경제전의 승패가 서로 다른 시간표로 움직였던 것이다.
지금 이란의 전략도 이 교훈의 연장선에 있다. 호르무즈 완전 봉쇄에서 ‘선별 통과·검문·지연’으로 수위를 조절하며 통항 선박을 사실상 통제하는 전술이다. 총탄이 멎은 뒤에도 고유가를 장기간 유지할 지렛대를 확보하려는 포석이다. 종전협상 중이라도 이란이 미국의 역봉쇄에 반발해 걸프국가의 정유시설이나 호르무즈 해협을 운항하는 선박을 공격하면 세계경제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우리에게는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국제유가의 추가상승과 해상 운임·보험료 폭등이 동시에 한국 경제를 덮친다. 휴전이나 미국의 일방적 종전선언이 나오더라도 이란이 합법·불법을 넘나드는 통제수단을 동원하면 1973년처럼 ‘전쟁 후 진짜 경제전’이 재연될 수 있다. 한국은 휴전되면 기름값이 내려간다는 안이한 기대가 아니라 고유가와 물량 불안이 장기 상수가 된 시대를 상정하고 에너지·산업·재정정책을 짜야 한다.
이런 국면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대응은 현실 인식과 초기 대응 속도 측면에서 평가할 만하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폭격 직후 교민·선박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군용기 투입과 신속대응팀 가동을 지시했다. 고물가·고유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신속한 추경 편성과 유류세 인하, 에너지 지원 대책을 동시에 꺼낸 것도 단기 방파제로서 의미가 있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대한민국 체제를 근본적으로 손보겠다는 구상은 단순한 위기방어를 넘어 ‘위기 이후’를 준비하겠다는 청사진이다.
선거와 분리된 초당적 의제로 다뤄야
문제는 정치권이다. 고물가·고환율·유가 급등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여야는 “엄중 대응”을 입에 올리면서도 행보는 따로 논다. 위기를 정쟁의 소재로 소비할 뿐 장기전을 함께 설계할 책임감은 보이지 않는다. 대안은 위기인식을 공유한 장기전 전략 설계다.
첫째, 정부는 중동전쟁과 호르무즈 사태를 중장기 상수로 전제하고 에너지·해운·금융·복지를 한 테이블에 올린 통합 패키지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에너지·해운 비상계획을 유가 120~150달러와 물량 부족이 상수인 상황에 맞게 재설계하고, 전략비축유 확대와 도입선 다변화, 호르무즈를 우회하는 파이프라인·LNG·대체공급선에 대한 중장기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선거용 프레임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1973년 이후 처음 맞는 물량부족형 에너지 위기라는 인식 위에서 에너지·복지·금융 안전망의 핵심 법·제도만큼은 선거와 분리된 초당적 의제로 관리해야 한다. 미-이란 협상이 몇 번 더 깨지든, 전쟁이 어느 시점에 종결 선언을 맞든, 한국이 준비된 나라로 남느냐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쟁의 종결 날짜 예측이 아니다. 위기를 견딜 체력을 만들 시간이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치권이 자각하는 일이다.
김기수 정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