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에너지, 길을 잃다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지난 2월 말 시작된 중동 지역의 전쟁은 글로벌 에너지시장을 순식간에 뒤흔들었다. 폭 33km의 호르무즈 해협은 우리에게도 생명선이다. 수입 석유의 70% 이상, LNG의 20%가 여기를 통과한다. 주가와 환율이 요동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과 비닐의 원료인 나프타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서 수입되고 있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기후위기 대응 에너지전환을 위해 호기롭게 출범한 기후에너지환경부 장차관들은 에너지 절약을 위한 길거리 홍보와 종량제 쓰레기봉투 수급 상황을 점검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결국 에너지는 다시 먹고사는 문제로 돌아왔다.
인류가 석유에 본격적으로 중독되기 시작한 시기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무렵이었으니 불과 80여년 전이다. 전쟁을 통해서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한 승전국들은 중동의 지정학적 질서를 인위적으로 재편하며 값싸고 안정적인 석유 공급체제를 구축했다. 전쟁 물자를 생산하던 군수산업들이 자동차·항공·석유화학산업으로 전환되면서 전후 인류 사회는 그야말로 석유 중심 문명의 황금기를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1970년대 오일쇼크가 닥쳤다. 미국 카터행정부는 당시 상황을 석유 과소비에 따른 도덕적 위기로 규정하고 에너지 절약과 대체에너지 확대를 추진했다. 그러나 극심한 고유가 시대가 끝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석유 중심 사회로 회귀했다.
그 후에도 여러차례 위기들이 있었지만 에너지전환 시도들은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석유를 포함한 인류가 사용하는 화석연료 비중은 지금까지도 견고하게 80%대를 유지하고 있다.
에너지전환, 국가 생존 차원의 문제
미국 서부 텍사스 유전 지대를 배경으로 석유 산업의 거친 야생성을 다루는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랜드맨’은 석유 중심 사회의 견고한 생존본능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필자는 이 드라마에서 석유업계 주요 임원들이 석유산업의 미래를 논하는 장면을 몇번이나 돌려 보았다.
참석자들은 날로 심해지는 환경규제뿐만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도덕적 당위성 때문에라도 풍력과 같은 청정에너지 사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극 중의 석유 거물 몬티는 이를 한가한 소리라며 일갈한다. 우리는 어차피 악당으로 취급받고 있으니 자꾸만 사회적·정치적 담론으로 세탁하려 하지 말고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가를 올려 이 사업이 지속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독설을 퍼붓는다. 그런데 지금 유가 100달러 시대가 됐다. 극중에서 몬티가 주장한 수준보다 훨씬 높다.
전세계 석유사업가들은 살판이 났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언제 수요 피크가 도래할지 전전긍긍하던 그들은 반세기 전 오일쇼크 시절에나 맛보았던 공급부족 상황을 다시 즐기게 되었다. 실제로 지난 한달 동안 전 세계 석유 수송량의 20%가 줄어들었다. 작금의 중동전쟁 이후에 ‘랜드맨’ 후속편이 나온다면 어떻게 전개될지 자못 궁금하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지금 상황이 지금까지의 모든 에너지 위기들을 합친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에너지안보 이슈가 동시에 충돌하는 복합위기 상황이다. 전쟁 후에도 상당 기간 100달러 고유가 상황이 지속될 것이니 석유의 공급처 다변화와 비축 확대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각자도생의 새로운 세계질서에서는 누구도 우리가 필요한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젠 국가 생존 차원에서 에너지전환을 정말 심각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간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에너지전환 담론처럼 선언이나 목표 수준 논쟁에 머물러서 될 일이 아니다.
화석연료 중심 구조 바꾸지 않으면 위기 반복
다행히도 연료전환은 길이 보인다. 전기 생산에서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비중을 늘리고 자동차용 석유소비를 줄이기 위한 전기차 보급 확대는 속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원료의 전환은 대책이 없다. 플라스틱, 합성섬유, 각종 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석유화학 산업 원료의 전환은 지금까지 애써 외면해 왔다. 지금부터라도 일상에서의 석유화학 제품 낭비를 줄이는 획기적인 행동 변화와 함께 혁신적인 원료 전환 수단 확보에 집중해야 한다.
지금의 화석연료 중심의 사회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면 앞으로 또 다른 호르무즈 해협이 등장할 때마다 같은 위기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당장 내일 아침 2부제 출근길을 걱정해야 할 필자 자신부터가 혼란스럽다. 그래서 지금의 전환 담론은 공허하기도 하다. 지금 에너지는 분명 길을 잃었다. 그래도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을 찾게 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