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천 칼럼
반도체 내재화 전쟁, 새로운 게임 시작됐다
일론 머스크가 다소 무모해 보이는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반도체 공장을 직접 짓겠다는 ‘테라팹’ 구상이 그것이다.(로이터, 2026년 3월 23일 자)
그가 미국 텍사스에 세우려는 이 반도체 공장은 기존 범용 칩만으로는 자신의 비전을 담아낼 수 없다는 판단을 깔고 있다. 단순한 생산시설 신설이 아니라 반도체를 포함한 산업 생태계의 조성자로 변신하겠다는 야심에 가깝다. 엔비디아를 위협하는 전략으로도 읽힌다.
삼성전자와 TSMC라는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 기업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굳이 막대한 자본과 시간을 들여 생산시설을 내재화하겠다는 발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른 기업이라면 막대한 초기투자와 수율 문제, 공정기술의 불확실성 때문에 외주 생산을 택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후발주자로서 실패 확률도 높다. 반도체 산업은 한 번의 실패가 단기간에 교정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테라팹이 계획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머스크는 자신이 구상하는 거대 산업 생태계 전반을 떠받치기 위해 외주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반도체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구글 아마존 메타가 그보다 앞서 독자적인 인공지능(AI) 칩을 개발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반도체 수요 기업 전반에서 내재화 역량 강화가 하나의 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테라팹은 그 공장 규모 자체가 파격적이라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테라팹 구상, 머스크의 반도체 승부수
왜 그렇게 큰 규모를 상정하는가. 전기차,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 우주위성,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에 이르기까지 머스크의 사업은 모두 막대한 저장 능력과 연산 능력을 필요로 한다. 이런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할 경우 엔비디아나 삼성 등 외부 공급망에만 의존해서는 속도와 에너지 효율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보면 연산 시간과 에너지 소모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계산 칩(GPU) 사이의 데이터 이동이다. 이 이동 횟수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못하면 병목현상을 피하기 어렵고, 잦은 이동은 과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머스크의 구상은 데이터 이동 자체를 현행 대비 수천분의 1, 수만분의 1 수준으로 줄여 보겠다는 데 있다. 메모리 창고에서 조립 공장으로 보내기 전에 미리 조립해 물류비를 줄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가 선제적으로 밀어붙이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우주산업은 특히 선점 효과가 절대적인 분야다. 먼저 대규모 연산 능력을 확보하고 데이터를 축적한 쪽이 시장을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환경에서는 산업 전반을 장악하는 통제권이 핵심이다. 결국 연산 속도와 에너지 효율에서 앞서는 자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병목이 생기는 핵심 부문을 외부에 맡기지 않고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은 머스크 전략의 본질이었다. 자동차에서는 배터리와 소프트웨어를, 우주에서는 로켓과 엔진을 직접 만들며 초기 비효율을 감수해 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택은 강력한 경쟁력의 토대가 됐다. 그는 이를 반복해서 입증해 왔다.
테라팹이 성공한다면, 하드웨어는 이제 소프트웨어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로 한층 더 분명히 재편될 수 있다. 과거에는 하드웨어가 먼저였고, 소프트웨어는 그 위에서 작동하는 부속물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주종관계가 뒤집히고 있다. 어떤 소프트웨어를 돌릴 것인지가 먼저 결정되고,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하드웨어가 뒤따라 설계되는 구조다. 경쟁력의 원천이 칩 자체에서 메모리 상단과 시스템 전체를 지배하는 소프트웨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변화에 더디게 반응해 온 삼성전자에는 위기일 수 있다. 더 작게, 더 빠르게, 더 안정적으로 만드는 능력, 곧 나노미터 경쟁으로 상징되는 제조 역량은 삼성전자와 인텔 같은 전통 반도체 기업의 핵심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흐름이 달라졌다. ‘소프트웨어가 정의하는 하드웨어’라는 거대한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삼성전자, 내재화 흐름에 답해야
이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분명하다. 메모리 위에 연산 로직이라는 새로운 축을 얹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반도체 성능을 구현해야 한다. 완전한 내재화 대신 삼성전자를 ‘중간 선택지’ 파트너로 만들 수 있어야 고객 이탈을 막을 수 있다.
지금 삼성전자는 엔비디아 중심의 범용 GPU 생태계에 올라타 HBM 수요 증가의 수혜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테라팹 시도가 현실화돼 핵심 고객들이 범용 GPU 대신 자체 설계한 고성능 칩으로 이동하는 순간 삼성의 위치는 다시 정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재화 추세에 대응하려면 고객이 요구하는 시스템 성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테라팹이 던진 위협을 기회로 바꾸는 길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