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 직격탄…동남아 경제 덮쳤다
유가 급등·공급망 차질·보조금 부담으로 '삼중고' … 에너지 의존 구조의 역습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달 4일자 “어떻게 페르시아 전쟁이 아시아의 위기가 되어가고 있는가” 제하의 기사에서 가격, 부채 및 결핍이 세계의 작업장을 강타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시아가 이번 중동 전쟁 여파의 2차 영향 지역으로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취지의 분석을 하고 있다.
미사일과 드론이 페르시아만을 가로 질러 비행하고 있으나 그 영향은 먼 대양 건너에서 느껴지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90% 이상의 에너지 수입 물량이 중동에서 온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6일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가 선택하거나 원하지 않았던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다”면서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통상적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석유의 약 80%와 가스의 약 90%가 아시아 시장을 목적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가급등에 동남아 재정 압박 현실화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아시아 경제에 세 가지 큰 위험을 제기한다. 첫째는 상승하는 연료 가격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해 경제 성장을 위축시킨다. 전쟁 개시 이래 전 세계적으로 휘발유 가격은 14% 인상됐다. 동남아 국가들은 이 수치가 42%에 달하고 필리핀과 미얀마에서는 70% 이상 급증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파르게 인상된 국가 그룹에 속한다.
둘째 위험은 아시아 정부의 재정 수지 대차대조표에 미칠 영향이다. 다수 국가가 이미 에너지 분야에 보조금을 주거나 연료류 가격을 인위적으로 책정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을 지출했다. 이런 재정 여력은 나라마다 큰 차이가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점증하는 석유류 보조금이 GDP 3%의 재정적자 상한선을 깨트릴 수 있다. 정부가 원유 가격상승분을 흡수하지 않으면 에너지값 오름세가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인플레이션은 식품에서 나올 수 있다. 중동 전쟁은 전 세계 해상 비료 교역의 1/3을 묶었다. 올해 말 파종 시기때 식료품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올해 아시아 물가가 2.1% 수준일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현재 ADB는 전쟁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것인지에 따라 5%를 상회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물가 상승이 아시아 정책 입안자들에게 경제적 문제라면 석유류 확보 가능성은 정치와 지리의 문제로, 아시아가 직면한 세 번째 과제이다.
연료비 폭등에 서민 생계·지역경제 흔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동남아시아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석유에 크게 의존한다. 동남아 지역 원유 수입의 거의 80%, LNG 수입의 약 1/4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온다.
'행운의 축복'이라는 태국 중부 지방의 새우 잡이 배는 한 달 내내 부두에 정박해 있다. 어선 주인인 위타야씨는 더 이상 선박 연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3월부터 출항하지 못하고 있다. 3월 들어 연료비가 75% 상승했다. 그는 “여태껏 처한 역경 중 최악”이라고 토로했다. 트럭 운전사 쁘라윤씨는 최근 며칠 새 소득이 반토막 났다고 한탄했다.
한평생 어업에 종사했던 필리핀의 아르카나씨는 다른 일자리를 찾고 있다. 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석유 파동이 동남아 전역으로 파급되며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고 지방 경제를 압박하며 대중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있다.
태국 사뭇사콘주 연안 어업인 단체장인 수차트켄당씨는 “이 전쟁은 해외에서 발생한 위기이지만 피해를 보는 계층은 우리들”이라고 했다. 필리핀 정부는 마닐라 인근의 수만명에 달하는 전통 삼륜차 트라이서클과 지프니 운전사들에게 각각 84달러 상당의 지원금을 나눠줬다.
주유소 폐쇄·비상 절약 조치 속출
현재 석유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국으로부터 연료를 구매하는 내륙국 라오스에서는 연료가 바닥이 난 탓에 전체 주유소 30% 이상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태국과 베트남에서 연료를 수입하는 캄보디아도 전국 주유소의 약 1/3이 영업을 중단한 상태이다.
베트남에서는 정부가 비필수 사무실 근무 직원에 대해 재택근무를 하도록 강력히 권장하고 있다. 태국 총리는 반소매 셔츠를 입으며 동료 공무원들에게 동일한 복장을 착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태국과 필리핀의 공무원들은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라오스 정부는 학교 수업을 주 5일에서 3일로 단축해 대면 수업을 행하도록 했다.
이 지역 다수 국가의 석유 비축량은 위태로울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이웃국가인 일본과 한국은 200일 이상 버틸 수 있 있는 비축분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20~30일 분, 미얀마는 40일 분을 확보하고 있으며, 태국은 최근까지 60일까지 견딜 비축물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동남아 정부들은 석유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순 에너지 수입국인 필리핀과 태국은 이번 충격에 가장 취약하다. 소요 석유의 전부를 수입하는 필리핀의 에너지 시장은 가격 변동에 매우 민감하다.
글로벌 가격이 상승하면 이는 빠르게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태국 정부는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에 대비해 긴급 연료 배급 계획을 마련했다. 태국은 동남아 지역 정제유 생산 허브이며 2014년에 정제 석유류 제품 75억달러어치를 수출했다. 대부분 수출 물량이 이젠 국내 시장용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는 태국에서 석유류 제품을 수입하는 나라들을 더 압박하고 제품 가격의 상방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비보조 석유류 가격이 상승세를 보이는 가운데, 정부는 일부 유종에 대해 월 10억달러 안팎의 보조금을 계속 투입하고 있다. 관대한 보조금 제도를 갖춘 인도네시아 역시 석유류 가격 인상에 반대해 왔다. 일부 제품에는 제한이 도입될 전망이며, 금요일 재택근무도 권장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가격 안정을 우선시하며 재정 부담을 감수하고 있다.
아세안·국제사회, 항행자유 공조 나서
위기의 실체가 롤러코스터처럼 동남아 개별 국가 전체로 숨 가쁘게 확산되어 나가는 움직임과 병행해 아세안 차원의 대응 또한 눈길을 끈다.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로운 항행 보장과 항행 안전에 국제사회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가운데 공해상에서 항해의 자유라는 국제법의 보편적 원칙을 지키기 위한 국제 연대가 출범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17일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하는 호르무즈해협 항행의 자유를 위한 국제 다자 화상 정상회의가 50여개국과 2개 국제기구가 참가한 가운데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열렸다.
우리나라와 동남아 국가들 역시 비중 있게 참여해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추며 연대를 과시했다.
앞서 13일에는 아세안 의장국 필리핀의 라사로 외교장관이 긴급 아세안 외교장관 화상 회의를 소집했다. 아세안 외교장관들은 현황의 위중함에 인식을 같이하고 아세안 차원의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또 의장성명을 내고 미국과 이란에 종전협상을 재개하고, 호르무즈 해협에서 선박과 항공기의 안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지속적인 통행이 회복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모든 당사국에 선박과 승무원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아세안과 한·중·일을 잇는 지역 메카니즘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재확인했다.
이번 아세안 외교장관회의는 파리 화상 다자 정상회의에 힘을 보태고 규칙 기반 국제 질서 수호 의지를 과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아세안과 한중일 협력 메카니즘 내에서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지 표명 역시 시의적절 하다고 본다.
한국과 아세안은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자로 입지를 굳혀왔다. 국제 수로에서 항행의 자유 원칙 수호는 자유무역을 뒷받침하는 기둥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과 아세안 및 국제사회가 연대의 폭을 더 넓혀나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