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지능으로 안전 선진화

패러다임 전환, ‘증강적’ 안전으로 가다

2026-04-24 13:00:02 게재

대한민국의 반도체와 자동차가 지구촌의 동맥을 흐르고 K-컬처가 세계를 매혹하면서 서울 중앙박물관 관람객 수가 세계 3위를 자랑한다. 가히 신흥 선진국의 위용이다. 그런데 중요한 종합성적표가 하나 더 있다. 한 사회의 안전은 경제와 기술과 문화의 성숙도가 반영되는 문명사회의 종합성적표라 할 수 있다. 아쉽게 우리 재해사망률은 유럽 선진국에 비해 몇배의 차이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안전은 우리가 진정한 선진 사회로 가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마지막 중대 관문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안전 감수성은 극도로 높아졌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여론은 비등하고 정부는 극약 처방을 내놓으며 압박한다. 기업들은 앞다퉈 ‘안전 패러다임 전환’을 외치며 결의대회를 열고 사내의 빈벽마다 최고경영자의 서명이 담긴 선언문이 붙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통계는 요지부동이거나 오히려 역행하며 의미있는 전진은 체감되지 않는다.

진짜 ‘패러다임 전환’은 있었다. 안전 선진국들은 밀레니엄 초부터 마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듯한 전환을 겪고 있다. 시스템적 안전이 대두되며 하인리히 이래 70여년간 지속된 관점과 틀이 비판되고 재구성됐다. 국제적 기준인 국제표준화기구(ISO) 안전 문서들이 일제히 안전과 위험의 정의부터 바꿨다. 휴먼 에러도, 사고 분석도, 위험성 평가도 모두 해석과 방법이 달라졌다.

반면 우리는 눈과 귀를 닫고 오래된 러닝머신 위를 뛰고 있다. 여론의 질타와 정부 규제가 엄할수록 마음만 급해지고 시야는 오히려 좁아지게 마련이다. 세계적으로 첨단 산업 시스템을 다루는 나라인데 시스템의 통찰과 개혁은 미뤄 두고 말단적 도구와 감시, 독려에 매달린다. 패러다임 전환은 비장한 다짐이 아니다. 개념과 실행의 총체적 재구성을 말한다.

의문스런 사고분석과 위험성 평가

사고가 나면 우리 사회는 먼저 원흉을 찾는다. ‘사고가 불행인 만큼 그 원인은 범죄’라는 관점은 가슴에 호소하지만 실제적 사실은 아니다. ‘원흉을 제거하면 사고는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은 믿고 싶지만 역시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므로 그런 접근법의 사고조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작업자 실수’ ‘교육 보강’ ‘감독 철저’가 단골로 보고서에 오르지만 사고는 계속된다.

사병 자살 사건을 조사한 보고서가 만일 탄약 관리 문제를 주로 다루고 관리자 징계로 끝난다면 엉뚱하다 할 것이다. 국방부가 최근 심리 부검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평소에 무엇이 그를 얼마나 괴롭혔으며, 그 환경은 어떻게 생겨났고, 얼마나 퍼져 있는지 등이 문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개선의 중점은 탄약 관리가 아니라 부대 경험의 변화가 된다.

그러면 산업 사고에서도 보이는 작업자 실수는 시스템 내에 숨은 안보이는 심층 요인들의 결과가 아닐까? 지금처럼 사람을 잡고 시스템의 원인들을 놓치면 그것들은 근처를 배회하다가 다른 작업자에게 다시 찾아 올 것이다. 시스템을 놓쳤다.

한편 제도적으로 중요시되는 위험성 평가는 ‘서류 안전’의 극치를 보여준다. 기업들이 준비하는 수 백쪽에 달하는 위험목록은 규제 기관을 만족시키고 책임자를 보호하기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정작 사고를 막는 데는 별 효과가 없다. 자주 청취되는 안전관리자들의 고백이다. 사고가 나면 요인은 쉽게 대여섯 개가 넘는데, 사고의 예측은 각각 엑셀 한줄씩이라니 모순이 아닌가?

사고는 일차원적 사슬로 설명되지 않는 만큼 그런 식으로 예측될 수도 없다. 맞는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쉬운 답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스템의 생리와 맞지 않는 일을 힘들여 한다고 서류가 사고를 잘 막아줄 리는 없다. 다시, 시스템을 놓쳤다.

시스템적인 ‘증강적 안전’의 혁명

기존 안전관리는 눈에 띄는 위험을 찾아 처리하자는 ‘감소적(Decremental) 안전’에 해당한다. 병원에 자주 가서 모든 병을 없애자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병에 안 걸리려고 건강을 지킨다. 시스템의 건강은 도전에 대응하는 탄력성(레질리언스)이다. 이것을 계속 증강시키는 것이 안전-II 또는 ‘증강적(Incremental) 안전’이다.

상황을 인지하고 대응하고 학습하고 전망하는 능력이 없으면, 동물도 기업도 생명력이 지속될 수 없다. 이 생명력, 즉 사고 방지력을 기르는 것은 고도의 시스템 공학적 설계와 운용을 요구한다. 현장과 경영이 연결돼 정보와 지능과 문화로 박동하는 총체적인 시스템 안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실에 부합하는 전략이다. 현실적이지 않으면 효능이 있겠는가.

윤완철

카이스트 명예교수 한국시스템안전학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