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동남아에서 잃은 외교적 신뢰

2026-04-24 13:00:02 게재

아세안, 경제 충격 넘어 정치·안보 불안…미중 사이 전략적 헤징 강화로 생존전략 모색

2026년 2월 28일 아침,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동시 공습으로 시작된 미-이란 전쟁은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를 충격과 당혹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파장은 유럽의 나토(NATO) 국가나 일본 한국 등 미국의 우방국은 물론, 미국과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지 않는 나라들에도 똑같이 미쳤다.

공습 개시 39일 만인 4월 7일 휴전에 들어간 이 전쟁이 이쯤에서 끝나든 안 끝나든 향후 각국의 외교정책과 국제정치, 나아가 세계질서에 끼칠 영향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아세안과 동남아 국가들도 이번 전쟁의 충격과 피해를 실감하고 있다.

동남아 국가에 정치적·심리적 상처 남겨

이번 전쟁은 동남아 국가들에 유가폭등과 물류마비 같은 경제적 피해 수준을 넘어서는 깊은 정치적·심리적 상처를 남겼다. 전쟁 개시와 수행 전 과정을 통해 보여준 미국의 일방주의는 아세안과 회원국들이 소중하게 키워온 ‘아세안 중심성’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또한 미국 스스로 내세워 온 ‘규칙기반의 국제질서’라는 가치를 훼손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파트너인 아세안을 패싱해 버린 것이다.

이제 동남아 안보에 있어 미국은 든든한 우방이라는 ‘상수’가 아니라 자국 이익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 원칙을 저버리고 입장을 바꿀 수 있는 불확실한 ‘변수’가 되어 버렸다. 미국이 이란의 군사기지에 포탄을 쏟아붓고 정권교체라는 단기적 목표에 매몰되는 것을 보며,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미국의 지정학적 우선순위에서 언제든 지워질 수 있음을 상상했을 것이다. 미국은 외교에서 가장 값비싼 자산인 신뢰를 돌이키기 힘든 수준으로 탕진해 버렸는지 모른다.

전쟁 개시 불과 사흘 만에 인도네시아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 “이제 규칙기반의 질서는 문서상에만 존재한다”라고 지적한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도덕적 파탄을 맞았음을 비판한 것이다. 미국이 이란과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보여준 국제법에 대한 자의적 해석은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향후 남중국해 분쟁 등에서 미국이 제공할 ‘규범적 보호’ 또한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동남아가 입은 경제적 타격은 더 직접적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 국제유가는 즉각 반응했고,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대부분의 아세안 회원국은 대책 없이 유가상승의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태국은 유가상승에 대비해 유류 수출을 금지했고, 베트남은 에너지 소비 절감을 위한 국가 권고안을 내놓았으며, 2026년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은 국가 비상사태에 준하는 에너지 비상대책을 발표했다.

아세안 국가들이 당면한 어려운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는 미국에 시위라도 하듯 즉각 중국으로 눈을 돌린 나라는 인도네시아였다. 전쟁 여파로 달러가치가 급등하자 인도네시아는 중국과 무역에서 현지 통화 결제 비중을 대폭 늘리는 스와프협정 확대를 통해 ‘탈달러화’ 행보를 가속화했다.

전쟁 틈타 영향력 확대 노린 중국

중국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도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내전으로 정당성을 위협받는 미얀마 군사정권에 생명줄 같은 연료를 공급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미얀마를 관통하여 안다만해에 이르는 송유관 설치를 통해 아세안 국가들을 에너지 위기로부터 구하겠다는 계획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도 충분히 유혹적이다. 미국이 전쟁을 통해 공급망을 교란할 때, 중국은 자신들이 구축한 물류망을 통해 유통의 안정성을 보장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중국은 전쟁의 혼란과 충격을 기회로 활용하는 영리하고 기회주의적인 중재자로 부상했다. 중국은 자신이 가진 소프트파워를 동원해 무력 대신 외교를, 파괴 대신 대화를 통한 해결을 선택함으로써 미국의 전쟁광 이미지에 대비되는 평화주의자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4월 초 미국의 이란 공습을 “주권침해와 국제법 위반에 반대한다”라며 직접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고는 이란과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미-이란 사이의 임시 휴전을 이끌어내는 데 막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이 ‘전쟁의 공포’를 과시할 때 중국은 ‘평화의 대안’을 제시하는 해결사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미국을 대신해 중국이 새로운 글로벌 리더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2026년 4월 싱가포르 ISEAS-유소프 이삭 연구소가 실시한 조사에서 동남아 엘리트층의 중국 선호도가 역대 최고치(52%)를 기록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또한 중국(55.9%)이 경제적 영향력 면에서 미국(15.3%)을 압도한다고 답한 동남아인들의 현실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남아가 쉽게 중국의 품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예단은 금물이다. 아세안 국가들이 중국으로 기우는 듯 보이는 지표 이면에는 거대한 불신의 벽이 존재한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보여준 중국의 패권적 팽창주의,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 뿌리 깊은 반중정서, 그리고 일대일로 사업이 동남아 대륙부 빈국들에 남긴 ‘부채의 덫’은 중국이 결코 존경받는 리더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원칙 없는 외교와 권위주의 수출은 중국을 안정적인 파트너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정적 결함이다. 동남아 지도자들은 중국이 제공하는 경제적 혜택이 언제든 자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정치적 압력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중국 의존 속 깊어지는 구조적 불신

또한 동남아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 파트너인 중국은 동시에 남중국해 분쟁에서 보듯 주변국의 주권을 직접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이 주는 위협은 미국보다 훨씬 실질적인 것이다. 베트남 외무부가 4월 7일 휴전소식을 반기면서도 “모든 당사자는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중국의 팽창주의적 성향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동남아 국가들에 중국이란 최선의 선택지라기보다 불가피한 ‘환경적 조건’에 가까우며, 협력 파트너인 동시에 경계와 경쟁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베트남의 ‘대나무 외교’처럼 상황에 따라 협력과 견제를 병행하는 유연한 전략이 아세안 외교의 기조가 되었다.

결국 오늘날 동남아시아는 미국의 자국우선주의와 중국의 지역 패권주의 사이에서, 미국의 전쟁과 중국의 수습 사이에서, 그리고 미국에 대한 실망과 중국에 대한 불신 사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유연하지만 난해한 전략적 대안을 요구받고 있다. 아세안에 ‘전략적 헤징(Hedging)’이란 이제 하나의 옵션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강제된 생존 방식이 되었다.

동남아 국가들이 이제 집단적으로나 개별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보장되는 미래를 향해 마땅한 대안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더 이상 무조건 추종할 수 있는 후원국이 아니며, 중국은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지만 그 진의를 신뢰할 수 없다.

미국이 다시 돌아온다 해도 한 번 금이 간 신뢰를 수선하기는 어려울 것이며,중국은 이번 전쟁통에서 다소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할지라도, 아세안의 마음을 온전히 얻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은 21세기 들어 여러 차례 동아시아를 떠났다가 회귀한 전력이 있으며, 중국의 지역 협력에 대해서는 동남아 국가들이 이미 냉정한 손익계산서를 내놓고 있는 시점이다.

미중 사이 아세안 생존 전략 시험대

지금 아세안이 걷고 있는 고독한 행보는 강대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일지도 모른다. 동남아 지역에서 미중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결과 교착상태는 미-이란 전쟁을 겪으면서 안보지형을 더욱 파편화·다극화로 이끌고 있으며, 이는 자칫 역내외 군비경쟁까지 초래할 위험성까지 보이고 있다.

지정학적 판도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미-이란 전쟁은 지역을 넘어 세계 질서의 미래에 중대한 함의를 던지고 있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