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지는 ESG 공시 의무화, 수출 경쟁력 약화 우려”
국회예산정책처 “시기·대상 모두 뒤처져” …제조 기업 무방비 상태 방치
지체할 시간 없는 주요국 환경규제 흐름 … 글로벌 탄소 무역 장벽 직면
금융위원회가 이달 중 ‘지속가능성(ESG) 공시’ 최종 로드맵을 발표할 예정이다. 정치권과 학계, 시민사회 단체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단계적 도입 방안이 시기와 의무화 대상 기준 모두 뒤처져 글로벌 주요국 규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회예산정책처에서는 늦어지는 ESG 공시 의무화로 한국 제조기업들의 수출 경쟁력 약화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ESG 공시 의무화가 주요국보다 늦게 시작되는 데다 탄소배출이 많은 제조업체들이 공시 대상에서 대거 제외되면서 한국 경제가 글로벌 탄소 무역 장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비판이다.
◆도입 지연…적용 대상 축소 = 24일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산업동향&이슈(제81호) ‘ESG 공시 의무화 시행에 따른 국내 현황 분석’에 따르면 한국의 ESG 공시 의무화 시점(2028년)은 주요국에 비해 지나치게 느리게 설정됐다. 지난 2월 금융위가 제시한 초안에 따르면 ESG 공시 의무화는 오는 2028년(2027회계연도) 자산 30조원 이상인 유가증권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된다. 공급망 전체 배출량인 ‘스코프 3’는 2031년부터 공시하도록 3년의 유예 기간을 뒀다. 자산·매출 비중이 10% 미만인 소규모 종속회사는 공시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는 예외 조항도 담겼다.
문제는 한층 더 높아진 글로벌 규제 문턱이다.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채택과 파리협정 체결 이후, 기업 경영 환경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됐다. 특히 글로벌 기관투자자의 ESG 투자 확대 등으로 ESG 경영이 기업 실질 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커짐에 따라, 전 세계 주요국은 ESG 공시 의무화를 선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EU는 2025년(2024 회계연도)부터 상장 대기업을 대상으로 지속가능성정보공시지침(CSRD) 기반의 공시를 의무화했다. 호주는 2026년 회계연도부터 대기업의 공시 의무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일본은 2027년 6월부터 시가총액 3조엔(약 27조원) 이상 프라임 기업을 대상으로 의무화를 추진하고, 2028년(2027회계연도)에는 1조엔(약 9조원)으로 기준을 적용해 대상을 확대할 예정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2025년부터 지수 상위 30개사를 대상으로 상장사 의무 공시를 즉각 시행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2026년 2월에야 코스피 상장사의 ESG 공시기준(KSSB) 및 로드맵(안)을 발표하며 2028년(2027회계연도)부터 의무화를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아시아 주요 경쟁국인 일본이나 싱가포르에 비해 1~2년 늦은 시점이다.
김윤희 국회예산정책처 분석관은 “글로벌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 흐름은 한국보다 빠르게 전개되고 있으나, 국내 ESG 공시제도는 경쟁국에 비해 도입이 지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용 대상 또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현실 담아내지 못해 = 더 큰 문제는 현재 정부가 제시한 의무화 기준이 자산 규모에 의존하고 있어, 탄소 다배출 산업인 제조업의 현실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8년부터 의무화를 우선 적용받는 자산 3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는 약 59개사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이 59개사 중 과반수인 32개사(54%)가 금융·보험사다. 반면 온실가스 배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 실질적인 전환 리스크에 직면한 제조기업은 단 16곳(28%)만이 의무화 첫해 대상에 포함된다.
당장 올해 1월부터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시행되면서 수출 기업의 탄소 배출량 보고 및 인증서 구매 부담이 가중될 전망이다. 국내 상장사들의 EU 수출액 중 CBAM 대상 품목 수출액은 연간 18~22억달러(약 2.4~3.0조원) 규모에 이른다. 글로벌 무역 규제 앞에서 국내 수출 기업들이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상황이다.
김윤희 분석관은 업종 간 불균형 초래 또한 지적했다. 그는 “우선 의무화 대상인 59개 상장사 중 32개사가 금융·보험업에 쏠려 있어 정작 온실가스 다배출 업종인 제조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며 “전환 리스크 관리가 시급한 제조 기업의 참여가 저조하여 공시의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느슨한 기준과 왜곡된 공시 범위 ‘한계’ = 로드맵 초안의 공시 세부 지침과 유예 조항 역시 글로벌 자본시장의 눈높이를 맞추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급망 전반의 탄소배출을 뜻하는 스코프 3 공시에 대해 국제 표준인 ISSB는 1년의 전환 구제를 부여하는 반면, 한국은 무려 3년이라는 긴 유예 기간을 두어 국제 기준 대비 그 기간이 과도하게 길게 설정됐다.
또 공시 첫해 대상 기업이라도 자산 및 매출액이 연결 기준 10% 미만인 종속회사는 공시 의무를 면제할 수 있도록 예외 조항을 뒀다. 이에 따라 주요 상장사 평균 40여 개에 달하는 종속기업 중 단 1.3~1.7개만이 공시 범위에 포함될 것으로 예측된다.
김윤희 분석관은 “연결 재무제표 기준을 중시하는 글로벌 공시 표준과 비교할 때 정보의 축소 및 왜곡이 우려된다”며 “외국인과 기관투자자의 신뢰성을 확보하고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신속히 ESG공시 의무화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국인지분율 상위 25% 기업의 ESG 공시율(60%)은 하위 25%(7%) 대비 8배 이상 높아, 외국인지분율과 ESG 공시 간 비교적 높은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국민연금(NPS) 지분율 상위 25% 기업의 ESG 공시율(71%)은 하위 25%(1%) 대비 크게 높아, NPS 지분율과 ESG 공시 간 높은 양(+)의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ESG 공시, 밸류업 위한 필수 조건 = 일각에서는 행정적 부담을 명목으로 제도의 연착륙을 주장한다.
하지만 김윤희 분석관이 2025년 기준 코스피 상장기업의 ESG 공시 여부에 따른 그룹별 특징을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투자유인 효과, 리스크관리 및 업종·업력별 차이가 뚜렷이 나타났다. 자본시장의 데이터는 ESG 공시가 곧 상장사의 생존이자 밸류업의 핵심 동력임을 명확히 보여준 셈이다.
ESG 공시를 이행하는 상장기업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1.41로 미공시 기업(1.09)을 상회한다.
이는 공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기업 가치 제고에 직접 기여함을 증명한다. 외국인 지분율 역시 공시 기업이 18.7%로, 미공시 기업(7.4%) 대비 2.5배 가량 높게 나타났다. 국민연금(NPS)의 평균 보유 주식금액 또한 공시 기업(5320억원)이 미공시 기업(304억원)을 웃돈다.
반대로 미공시 기업일수록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반대 등) 건수가 15.6건으로 공시 기업(10.8건)보다 높게 나타나, 공시 외면이 심각한 지배구조 리스크로 이어짐을 방증하고 있다. 특히 실증 분석에 따르면 30~70년 업력을 가진 오랜 제조기업일수록 ESG 공시에 소극적이며(미공시 제조기업 평균 업력 47.5년), 이들의 수익성(ROE 0.4%)과 ESG 리스크 점수(31.3점) 모두 매우 열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오래되고 규모가 작은 제조업이 ESG 제도의 가장 큰 사각지대임을 고려할 때, 기업 부담 완화라는 핑계로 공시 의무화를 지연시키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체질 개선 기회를 박탈하고 국제 시장 도태를 방조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금융위는 현행 자산 30조원 기준을 대폭 하향해 제조업 사각지대를 줄이고, 이미 202개 상장사가 참여해 데이터를 축적한 배출권거래제 등을 감안해 스코프 3 공시 시기를 앞당길 것, ESG 정보도 법정 공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