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기술신용평가(TCB) 사태의 교훈

2026-05-07 13:00:02 게재

1997년 외환위기는 우리 금융사에 기록된 뼈아픈 교훈이자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수많은 기업의 줄도산은 부동산 등 눈에 보이는 담보에만 의존하던 대출관행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증명했다. 시장은 비로소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인 신뢰, 즉 신용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998년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을 기점으로 도입된 현대적 의미의 크레딧 뷰로(CB) 제도는 지난 20여년간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지탱해 온 핵심 인프라로 자리잡았다.

외환위기 뼈아픈 교훈으로 탄생한 CB제도

하지만 최근 기술신용평가(TCB)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등급 조작과 부실 평가 논란은 우리가 쌓아 올린 견고한 신용인프라가 양적성과 중심의 정책 기조라는 변수와 만났을 때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014년 기업의 기술력을 담보로 혁신 부문에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기술금융은 지난 10여년간 눈부신 양적성장을 거듭했다. 2024년 말 기준 기술금융 대출 잔액은 약 320조원을 상회하며 전체 기업 대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숫자의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TCB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반면교사는 정책의 목표가 공급 수치에만 매몰될 때 발생하는 구조적 부작용이다. 자금공급이라는 정책적 목표와 은행의 대출실적 경쟁이 강하게 맞물리면서 현장에서는 기술력 검증이라는 본질보다 숫자 맞추기식 평가가 횡행하게 되었다. 기술력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억지로 정량화해 대출의 근거로 끼워 맞추는 과정에서 등급은 인위적으로 부풀려졌고, 이는 결국 실질적인 상환능력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실 대출의 뇌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특정 기관의 일탈이 아니라 우리 정책금융 전반이 직면한 위험 신호다. 이재명정부가 추진하는 포용금융과 생산적 금융의 확대 기조는 올바른 방향이나, 그 성과를 오직 얼마를 공급했는가라는 공급자 중심의 단순 실적보고로만 측정하는 관행은 위험하다. 공급 규모를 늘리는 데만 급급해 리스크 관리라는 금융 본연의 기능을 도외시한다면 정책금융은 사회적 안전망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부실을 담보로 현재의 안위를 꾀하는 임시방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사태를 발판 삼아 우리 금융의 신용평가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시장의 논리와 정책의 논리를 명확히 구분하는 평가 체계의 이원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민간은행은 자율적인 리스크 관리와 상업적 원칙에 기반해 자신들만의 정교한 대안모형을 고도화하도록 시장논리에 맡겨 두어야 한다. 상업은행의 일반 여신심사에 무리하게 정책적 할당을 강요하는 것은 시장 리스크와 충돌해 자원 배분의 왜곡을 초래할 뿐이다.

반면 시장의 엄격한 잣대로는 포용하기 어려운 소상공인이나 혁신 스타트업들은 정책금융 기관이 정교하게 설계된 특화 심사 엔진을 통해 든든하게 받쳐주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정책금융은 단순히 민간 점수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성실 상환 의지나 미래 현금흐름, 재기계획 등을 반영한 독자적인 평가 모델을 갖추고 그 실효성을 입증해 나가야 한다.

금융의 신용평가 체계 근본적으로 재점검해야

1998년의 유산인 CB 제도가 지난 20여년간 우리 금융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듯 이제는 양적팽창의 관성을 멈추고 신용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데이터라는 나침반을 통해 신뢰 인프라를 재건할 때 비로소 실효성 있는 포용금융과 생산적 금융의 가치가 우리 경제 전반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유경원 상명대 교수, 경제금융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