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유가 88달러의 ‘라라랜드’ - 오판인가, 선견지명인가

2026-05-07 13:00:05 게재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커버스토리에서 “누군가 부탄가스(환각제)를 흡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원유 시장을 향한 원색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고, 전세계 일일 수요의 14%에 달하는 1400만 배럴의 공급이 매일 증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물 시장은 연말 유가가 배럴당 88달러로 복귀할 것이라는 이른바 ‘라라랜드’식 환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배럴당 88달러로 복귀는 환상

실제로 지난 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종전협상안에 수용 불가 입장을 밝히며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도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오히려 시장의 낙관론에 힘을 실어주는 파격적인 진단을 내놓았다.

베선트 장관은 미국의 철저한 해협 봉쇄로 이란의 원유 저장시설이 이미 임계치 수준의 포화상태, 즉 ‘탱크 톱’에 이르렀음을 지적했다. 이대로라면 이란은 늘어나는 공급량을 감당하지 못해 조만간 유정 자체를 폐쇄해야 하는 외통수에 몰리게 되고, 유정 시설의 물리적·기술적 보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원유수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공급과잉 역설’은 이란의 항복을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며, 전쟁 종결 직후 억눌렸던 물량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 유가 역시 2020년 팬데믹 당시 가격이나 2025년 평균가보다도 낮은 수준으로 폭락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면 이코노미스트는 현재의 유가급등을 재앙의 전조로 보고 있다. 하루 1400만 배럴의 공급 차단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의 5배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충격으로, 역사적 경험치에 비추어 이 정도의 파장은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상회하며 수요가 강제로 파괴되어야만 비로소 수급의 균형점이 잡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장은 여전히 트럼프의 통 큰 협상이 모든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UAE 탈퇴가 흔든 OPEC의 질서

위기의 변곡점에서 발생한 아랍에미리트(UAE)의 5월 1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전격 탈퇴는 국제 정세의 중대한 변수로 급부상했다. 약 1130억 배럴의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세계 6위의 자원부국 UAE는 현재 하루 400만 배럴 수준인 생산능력을 2027년까지 500만 배럴로 증대하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내왔다. 이를 위해 UAE 국영 석유회사인 아드노크는 향후 5년간 1500억달러 규모의 공격적인 설비 투자를 예고한 바 있다.

이는 탄소중립 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UAE의 국가 정책이 “석유를 땅속에 남겨두기보다 적기에 자산화하겠다”는 이른바 ‘현금화’ 전략으로 선회했음을 의미한다. 이에 ‘비전 2030’ 재원 마련을 위해 배럴당 최소 80~90달러의 재정 균형 유가가 절실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UAE는 저비용 생산구조를 바탕으로 빠르게 원유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결국 UAE 자본과 미국의 첨단기술, 그리고 이스라엘의 안보자산이 맞물려 ‘미국-이스라엘-UAE’라는 새로운 삼각동맹이 탄생했다. 이스라엘은 중동 내 무력투쟁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UAE는 ‘아랍의 형제애’라는 낡은 명분 대신 포스트 석유 시대의 기술적 생존권을 선택했다. 미국 역시 지난 50년간 세계질서를 지탱해 온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페트로 동맹’ 체제에서 벗어나, UAE를 매개로 더 이상 OPEC의 전략에 휘둘리지 않고 원유 생산과 가격 결정의 주도권을 쥘 기회를 맞이했다.

트럼프의 선택은 '세계'가 아닌 '미국'

그렇다면 원유시장의 새로운 질서를 주도하게 된 미국은 과연 세계 유가안정에 기여할 것인가. 트럼프행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철저히 자국중심적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를 앞둔 미국 대통령에게 ‘주유소의 고통’은 자신의 지지율 성적표와 다름없다. 1970년대 지미 카터 대통령은 오일쇼크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는 것이 정치권의 정설이다. 2022년 중간선거 당시 조 바이든행정부 역시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5달러를 돌파하자 지지율 폭락을 경험했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로 2022년 바이든 집권기에도 국내 수급 안정화를 위해 정제유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이 백악관 내부에서 심도 있게 검토된 바 있다.

당시 미 행정부는 정유사들에 “비상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는 경고성 서한을 보내며 수출 자제를 압박했다. 미국산 연료의 역외 수출은 세계 유가 안정에 기여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현재 미국 전략비축유(SPR)가 수십년 만에 최저치인 3억7000만 배럴 수준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2026년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행정부는 세계적인 공급 부족을 외면한 채 국내 유가안정을 위해 미국산 연료 수출을 제한하는 정치적 결단을 감행할 공산이 크다.

또 다른 관점에서 미국은 원유 생산량이 아니라 정제 능력에서 에너지 패권국가로서의 한계점도 드러내고 있다. 현재 미국의 정제 능력은 하루 약 1800만 배럴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이는 1970년대 이후 대규모 정유공장 신설이 전무했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의 정제 능력을 갖춘 노후 시설이 폐쇄된 데다 환경규제로 인해 가동 가능한 설비가 오히려 줄어든 탓이다.

현재 미국 정유시설 가동률은 95%로 임계치에 도달해 있다. 원유를 아무리 많이 캐내도 이를 휘발유나 디젤로 바꿔줄 공장이 포화상태라면 국내 유가를 잡을 유일한 방법은 정제유 수출을 막는 것뿐이다.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의 반사이익으로 미국의 대외 원유 수출량이 급증하고 있으나 트럼프행정부로서는 단기간 내 정제 능력을 향상시키기보다 수출 제한 카드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손쉬운 대응일 것이다.

설령 시장의 기대대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해도 중동산 원유가 과거처럼 세계 전역으로 유통되기까지는 상당한 물리적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유가 상승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호르무즈사태, 각자도생 시대의 전주곡

이코노미스트가 경고했듯 호르무즈 해협은 정치적 선언만으로 즉시 열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봉쇄기간 해협에 뿌려진 기뢰를 제거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 더욱이 로이즈와 같은 글로벌 보험사들이 전쟁 지역 할증료를 철회하고 해상보험 요율을 정상화하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급격한 가동중단으로 인한 유정의 압력 변화는 생산능력을 영구적으로 저하시킬 수 있고, 멈춰 섰던 정유시설이 다시 풀가동 체제로 복귀하는 데에도 상당한 기술적 준비 기간이 요구된다. 정치적 종전이 곧 에너지 공급의 즉각적인 재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선물시장은 마치 내일 당장 정치적 합의만 이뤄지면 원유가격이 곧바로 정상화될 것처럼 예상하고 있다. 이는 실물 경제의 복잡성을 간과한 금융시장의 오만에 가깝다.

어떤 이유에서든 석유 공급부족은 이미 ‘정해진 미래’로 굳어지고 있다. 이미 유럽 일부와 아시아의 에너지 빈국에서는 차량 홀짝제나 야간 조명 제한을 넘어, 국가가 직접 산업별 에너지를 할당하는 석유 배급제까지 검토되고 있다.

더욱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독점한 미국으로 글로벌 제조기업들이 공장을 옮기는 현상이 가속화될 경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0%를 상회하는 독일 일본 한국 등 제조 강국들은 국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UAE의 OPEC 탈퇴로 시작된 세계 에너지 질서의 변화는 결국 고물가·고에너지가 지배하는 각자도생 시대의 전주곡이다.

법무법인 서로변호사·M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