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CEO들 “중동 전쟁, 에너지 판도 바꾼다”
호르무즈 봉쇄로 공급망 취약성 부각
각국, 에너지 안보와 비축 확대 나설 듯
중동 전쟁이 세계 에너지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는 석유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의 진단이 잇따르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유 공급 차질이 커지면서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에너지 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CNBC가 9일(현지시간) 보도한 주요 석유·가스 기업 실적 발표 컨퍼런스콜 내용에 따르면, 석유 서비스 회사 SLB의 올리비에 르 푀슈 CEO는 이번 사태가 세계 에너지 체계의 취약성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경쟁사인 석유 서비스 회사 베이커휴스의 로렌초 시모넬리 CEO도 “이는 에너지 지형 전반에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이미 거의 10억배럴에 가까운 원유 공급 손실이 발생했다. 해상 통로가 닫힌 기간이 길어질수록 부족분은 더 커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중동산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를 들여오는 핵심 통로다. 이번 봉쇄는 특정 지역과 특정 해상 통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줬다.
석유 서비스 회사 핼리버턴의 제프리 밀러 CEO는 에너지 안보가 “더 이상 단순한 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모넬리 CEO도 “이는 단순히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튼튼하고 회복력 있는 에너지 기반시설, 더 큰 여유 능력, 기반시설 다변화, 단일 대형 자산에 대한 의존 축소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은 앞으로 각국 정부가 공급처 다변화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에너지 기업 엑슨모빌의 대런 우즈 CEO는 “분명히 사람들은 자신들의 에너지 안보를 재평가하고, 앞으로 같은 노출을 갖지 않도록 어떻게 보장할지 살펴볼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으로 줄어든 석유 비축분을 다시 채우는 움직임도 예상된다. 시모넬리 CEO는 “에너지 안보를 최우선에 두기 위해 세계 재고를 역사적 수준 이상으로 다시 쌓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원유 수요와 가격을 떠받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미국산 원유의 역할도 커질 것으로 전망됐다. 미국 셰일 석유 생산업체 다이아몬드백에너지의 케이스 반트 호프 CEO는 세계가 에너지 안보를 지키는 과정에서 미국산 원유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CNBC는 전쟁 기간 미국 원유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밀러 CEO는 공급 차질로 원유 시장이 “근본적으로 더 빠듯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원유 시장이 공급 과잉 전망에서 큰 부족 상태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르 푀슈 CEO는 높은 유가가 전쟁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아프리카와 미주, 아시아의 해상·심해 유전 개발 투자를 자극할 것으로 봤다. 르 푀슈 CEO는 특히 아프리카를 장기 투자처로 꼽았다. 그는 “아프리카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당한 석유·가스 자원 기반을 갖춘 가장 매력적인 장기 기회 중 하나”라며 “시간이 지나며 투자 배분이 이 지역에 더 우호적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다만 석유 투자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모넬리 CEO는 지정학적 충격이 원전, 지열, 전력망 현대화 같은 저탄소 에너지 투자도 계속 밀어 올릴 것이라고 봤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