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제조강국의 다음 무대
요즘 뉴스를 보면서 새삼 실감하는 것이 있다. 제조를 놓지 않은 나라의 힘이다. 반도체 공장 하나가 외교의 무게를 바꾸고, 조선소의 생산 능력이 협상 테이블의 자리를 결정한다. 자동차와 화학도 다르지 않다. 설계도는 있어도 만들지 못하는 나라와, 설계부터 생산까지 스스로 해내는 나라 사이의 간극은 단순한 기술격차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의 회복력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대체되지 않는 자리다. 과학기술과 제조가 함께 움직이는 나라, 그런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 힘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을까.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제조강국 위상은 누군가 먼저 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직 시장이 열리지도 않은 때에, 아직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는 때에, 먼저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소를 짓겠다고 나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는 나라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겠다는 것이 무모하게 보였을 것이다. 반도체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자동차를 독자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모두 터무니없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들이 결국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선구안은 언제나 그렇게 왔다. 모두가 확신할 때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확신하지 못할 때. 많은 사람이 “왜?”라고 물을 때, 소수가 “그래서 지금이다”라고 답하는 순간에.
우주, 실제 경제 작동하는 무대로 변신
그 선구안이 지금 다시 필요한 곳이 있다. 우주다. 최근 우주를 둘러싼 이야기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 우주는 더 이상 탐험과 도전의 공간으로만 이야기되지 않는다. 산업공간으로, 그리고 제조공간으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발사체가 반복적으로 성공하고, 민간 기업이 우주 사업에 뛰어들고, 우주정거장이 단순한 연구시설을 넘어 우주에서만 가능한 것들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면서, 우주는 서서히 실제 경제가 작동하는 무대로 변모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최근 학계와 산업계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우주에서의 제조, 이른바 우주제조다.
우주제조가 왜 필요한가. 지구에서 만들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 위의 모든 제조는 중력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중력은 제조 과정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액체는 아래로 흐르고, 무거운 물질은 가라앉으며, 물질의 혼합과 결정의 형성이 모두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우주의 무중력 환경은 이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가장 먼저 주목받는 분야는 바이오다. 지구에서는 중력 때문에 세포를 3차원 구조로 균일하게 배양하기 어렵다. 우주에서는 세포가 중력의 방해 없이 3차원으로 고르게 자란다. 단백질 결정도 마찬가지다. 지구에서는 중력의 영향으로 결정 구조가 불완전하게 형성되는 경우가 많지만, 우주에서는 훨씬 크고 정밀한 결정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인공 장기 개발과 신약 연구에서 전혀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바이오 외에도 반도체 소재, 광섬유, 특수합금 등 중력과 대기 조건 때문에 지구에서 제조에 한계가 있는 분야들이 우주제조의 잠재적 영역으로 거론된다. 우주 접근 비용이 낮아지고 우주정거장 활용이 현실화되면서 이 이야기는 점점 더 구체적인 산업 논의로 옮겨가고 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우주제조는 지금 막 가능성의 문을 두드리는 단계다. 비용도 크고,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우주에서 만든 제품을 지구로 안전하게 가져오는 것도,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는 것도 아직은 도전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이미 조용히 움직임이 시작됐다. 시장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열리기 전에 먼저 그 자리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우주제조 시대 새로운 기회 열려
우주제조를 현실로 만들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우주에 가는 기술,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제조 역량. 이 두 가지를 함께 갖춘 나라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우주기술은 있어도 제조 기반이 약한 나라가 있고, 제조는 되어도 우주로 나아갈 기술이 없는 나라도 있다. 한국은 그 드문 교차점에 서 있다.
누리호가 반복적으로 성공하며 독자 발사 역량을 쌓아가고 있고, 반도체와 정밀부품을 스스로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으며, 바이오와 소재 분야의 기초과학도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있다. 제조를 놓지 않은 나라가 우주기술까지 갖추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이 우주제조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한국이 가진 출발점이다.
제조를 놓지 않은 나라가 지금 이 시대에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우리는 이미 눈으로 보고 있다. 그 힘이 다음에는 어디서 발휘될 수 있을까. 우주제조는 아직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 때도, 반도체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처음엔 늘 그랬다. 선구안은 항상 그 자리에서 나왔다. 모두가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바로 그 시점에,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