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관련주는 훨훨, 비AI는 제자리
반도체주가 증시 끌어올렸지만···소비·제조·방산 곳곳서 경고음
파이낸셜타임스(FT) 11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여 만에 세계 주요 기업들의 시가총액은 5조4000억달러 늘었다. 증가율은 4.2%였다. 겉으로는 전쟁 충격보다 증시 회복이 더 강해 보이지만, FT는 상승분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 업종에 집중돼 있다고 분석했다.
FT 분석에 따르면 시가총액 100억달러 이상 반도체 기업들의 합산 가치는 2월 말 전쟁 시작 이후 26%, 금액으로는 3조7000억달러 증가했다.
인텔과 대만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 등 반도체주가 급등했고, 1분기 실적 호조를 등에 업은 빅테크도 빠르게 반등했다. 기업정보 분석회사 알파센스에 따르면 대형주 기업의 1분기 실적 발표에서 약 3분의2가 AI를 언급했다. 중동전쟁 언급의 약 두 배였다.
투자자들은 전쟁과 물가, 물류 차질 속에서도 기술주로 몰리고 있다. 피크테자산운용의 루카 파올리니 수석전략가는 투자자들이 “극도의 거시경제 불확실성” 속에서 미국 기술주의 “실적 달성 확실성”에 다시 끌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휴전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다시 AI였다”고 했다.
캐피털그룹의 투자 전문가 존 램도 “이것은 유행 같은 순환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투자 순환”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AI가 만든 지수 상승은 기업 전반의 현실과 다르다. FT 렉스 칼럼은 미국 증시가 소수 대형 기술주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UBS 분석에 따르면 S&P500 수익률의 대부분은 42개 종목이 이끌고 있다. 통상 약 100개 종목이 그 역할을 한다. AI 관련 대형 기술주가 끌어올린 S&P500은 3월 말 이후 12% 상승했지만, S&P500 동일가중지수 상승률은 그 절반에 그쳤다. FT는 빅테크의 영향력이 다른 기업들의 취약한 상태를 가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비AI 기업들의 실적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햄버거 체인 쉐이크쉑은 4월 동일매장 매출이 감소세로 돌아섰다고 밝혔다. 저가 헬스장 체인 플래닛피트니스도 성장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저소득층 소비자가 “커지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전업체 월풀은 3월 주방가전 수요가 10% 줄었다며 소비심리가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슷하다고 밝혔다. 월풀은 분기 배당도 중단했고, 올해 주가는 약 40% 하락했다.
중동전쟁의 물가 충격은 소비재 기업에서 뚜렷하다. FT는 호르무즈 해협 폐쇄가 비용을 끌어올리고 소비자 부담을 키우면서 소비재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생활용품 기업 프록터앤드갬블(P&G)과 킴벌리클라크는 가격 인상을 경고했다. 명품 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와 에르메스는 수요 둔화에 시달리고 있다. 자동차 기업들은 물류 차질과 알루미늄 등 원자재 가격 상승을 맞고 있다.
볼보자동차의 하칸 사무엘손 최고경영자는 미국 소비심리 둔화를 가장 우려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은 전체 경제에 압박을 가하고,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며 “그래서 지금은 차를 사거나 무엇이든 살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원자재와 방산도 예외가 아니다. 광산 기업들은 경유 가격 상승에 따른 투입 비용 증가와 세계 경기 둔화 가능성에 따른 원자재 가격 약세라는 이중 부담을 맞고 있다. 주요 미국·유럽 방산기업들의 가치도 하락했다. 투자자들은 방산업계가 공급망 병목을 뚫고 생산을 빠르게 늘릴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에너지 업종은 유가 급등의 수혜를 봤다. 전쟁 중 유가가 50% 뛰면서 사우디아람코, 페트로차이나, 토탈에너지스 등은 시가총액이 크게 늘었다. 사우디아람코는 전쟁 중 시가총액이 1440억달러 증가했다. 다만 걸프 지역 생산시설이 멈추거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엑슨모빌은 전쟁 이후 기업가치가 4%, 금액으로는 280억달러 줄었다.
결국 시장의 표면과 기업 현장의 온도차가 커지고 있다. AI와 반도체가 지수를 끌어올리면서 전쟁 충격은 덜 보인다. 그러나 연료비, 물류비, 원자재 가격, 소비 위축은 여러 업종에 이미 번지고 있다. FT는 AI 기대가 약해질 경우 투자자들이 “두 세계의 나쁜 점을 모두” 떠안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