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빅딜 시대…한국의 생존전략은 아세안
미·중 거래의 청구서가 중견국으로 향하는 시대 … 아세안과 에너지·디지털·공급망 생존공간 넓혀야
문제는 미국과 중국 간 빅딜(Big Deal)의 비용이 한국과 아세안 같은 중견 개방경제 국가에 전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중이 무역분쟁의 휴전 조건으로 서로의 영향력 지대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거나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할 경우, 사이에 낀 국가들은 통화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 산업 구조조정 압박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란 전쟁으로 인한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정은 미·중에는 협상의 지렛대일 수 있지만, 한국과 아세안에는 생존의 위협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에게 이란 휴전 중재를 요구하는 이유도 유가 안정이 미국 국내 정치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르무즈 해협 봉쇄 과정에서 중견국들은 이미 유가 급등과 물류 마비의 충격을 경험했다.
그동안 아세안은 미·중 패권 경쟁의 수동적 전장이자, 생산기지 이전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누리던 수혜자로 인식됐다. 하지만 2026년의 아세안은 더 이상 수혜자로만 자리매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중국 공급망에 편입돼 대미 수출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미국으로부터의 제재 위협이 커지는 이른바 성공의 역설이 가시화하고 있다. 바꾸어 생각하면 아세안 지역이 미·중 모두에게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가치를 지닌 공간으로 부상했음을 의미한다.
돌아보면 미·중 갈등이 격화될수록 아세안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옵션을 늘리는 고도화된 헤징 전략을 통해 자신들의 몸값을 높여왔다. 한국에 있어 아세안은 단순히 상품을 파는 시장이 아니라, 미·중이 설계한 양자택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생존 무대를 형성할 수 있는 핵심 파트너다. 한국은 아세안과 함께 에너지 안보, 디지털 규범,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이라는 세 가지 핵심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설계할 수 있다.
에너지·디지털 동맹이 미·중 리스크 줄인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에너지 안보다. 지난 4월 아세안에너지센터(ASEAN Centre for Energy)는 2025년 아세안 지역이 중동에서 수입 원유의 55%를 조달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아세안 회원국들에 국가 비상사태 수준의 충격을 안긴 이유다. 유가 급등은 아세안의 원유 수입 부담을 크게 늘리며 각국의 재정 건전성까지 흔들고 있다.
미·중이 에너지를 협상의 레버리지로 활용하는 동안, 한국은 아세안의 약점을 보완하는 에너지 협력 파트너로 자리 잡아야 한다. 한-아세안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 이행을 위한 행동계획 2026-2030(PoA)은 이미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자원 확보를 넘어 재생에너지 허브와 LNG 인프라를 공동 구축해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재생에너지 기술과 LNG 인프라 협력이 아세안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인다면, 이 지역은 미·중의 지정학적 거래에 흔들리지 않는 복원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는 미·중 중심의 화석연료 지정학을 넘어 새로운 에너지 안보 협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둘째는 디지털 경제다. 올 11월 서명 예정인 아세안 디지털경제프레임워크협정(DEFA)은 2030년까지 2조달러 규모로 성장할 디지털 경제의 규칙을 정하는 작업이다. 미국은 데이터의 자유로운 흐름과 서구식 개인정보 보호 규범을 요구하고, 중국은 디지털 실크로드를 통해 플랫폼과 데이터 주권 모델을 확산하려 한다.
아세안 DEFA가 미·중 간 플랫폼과 데이터 규범 경쟁의 장이 되는 순간, 아세안은 제재 압박과 규범 파편화라는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 한국은 한-아세안협력기금(AKCF)을 활용해 디지털경제리더십(DEAL) 프로젝트 지원을 확대함으로써 아세안과 함께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디지털 표준 구축에 기여할 수 있다. 한국의 AI 가드레일과 사이버 보안 협력 모델은 미·중의 극단적 시스템 사이에서 실용적인 제3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이는 2조달러 규모로 성장할 아세안 디지털 시장에서 한국 기술 표준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일본 견제 속 공급망 신뢰 경쟁 시작됐다
셋째는 공급망 전략이다. 이제 공급망의 기준은 효율성보다 신뢰와 안보에 가까워지고 있다. 특히 일본이 공적안보지원(OSA)과 중고 무기 지원을 통해 전후 평화주의 안보정책을 수정하며, 아세안에서 경제 파트너를 넘어 안보 파트너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축적한 신뢰를 안보 협력으로까지 확장하며 아세안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일본의 군사·안보 협력이 확대될수록 한국의 공급망·방산 협력 공간은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아세안 국가들이 안보와 공급망을 일본 중심으로 연결하기 시작하면, 한국 기업의 해양 인프라·방산·첨단 제조 협력 역시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핵심 원천기술은 국내에 두되, 아세안을 첨단 생산거점으로 연결하는 공급망 이원화(Dualization)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 단순한 생산 이전이 아니라 위기 시에도 중단되지 않는 신뢰 기반 공급망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도체와 배터리, 핵심 광물 분야에서 공동 비축과 긴급 조달 체계를 마련한다면 미·중 충돌 속에서도 공급망 복원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일본이 자본과 장비를 앞세운다면, 한국은 미래 성장과 기술 파트너십 중심의 협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 거대한 판 위에서 러시아도 분주하다. 러시아는 이란 전쟁과 미·중 관계의 경색이 가져다 준 유가 상승의 이익을 취하며 우크라이나 전선으로부터의 압박을 완화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 어부지리인 유가상승이 한국과 아세안에는 재정지출 확대와 경상수지 악화라는 형태로 되돌아온다. 결국 중동과 러시아를 둘러싼 에너지 지정학이 불안정할수록, 한국과 아세안은 공동으로 재생에너지와 LNG 인프라를 확충하여 유가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완충 지대의 설치가 긴요하다.
일본은 미·중의 결속을 극도로 우려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미·중이 디커플링을 지속해야 에너지믹스에서 전기 비중을 높이고 첨단 반도체를 포함한 차세대 성장동력을 확보할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다카이치 총리를 중심으로 강경한 대중 정책을 폄과 동시에, 아세안 회원국에 중고 무기를 수출하며 한국을 견제하는 이중 포석을 두고 있는 이유다. 이러한 주변국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한국이 아세안과의 연대를 통해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해야 할 당위성을 더욱 키운다.
미·중 사이 독자 생존공간 구축이 관건
자국 우선주의 시대에 미·중 정상회담이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보다는 청구서를 가져다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미·중 사이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고민하는 동안, 미·중은 이미 우리에게 보낼 거래 청구서를 마련했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아세안과 함께 공급망의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독자적인 경제안보 공간을 창출함으로써 완충 지대를 구축해야 한다. 일본이 아세안에서 안보와 공급망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지금, 한국이 아세안과 함께 위기 시 작동하는 공동 공급망 안전판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완충 지대는 일본 주도의 틀 안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행동계획 2026-2030(PoA)을 단순히 무역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는, 에너지·디지털·공급망의 신뢰를 강화하는 인프라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아세안이라는 전략 공간에서 우리가 자주적으로 구축한 신뢰 네트워크만이 미·중의 거래 청구서가 불러올 지정학적 격랑을 헤쳐 나갈 견고한 방파제가 될 것이다. 우리 앞에 거대한 위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세안과 함께 새로운 질서 형성의 주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