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회사 한국 국민과 영국 여행자의 대화

2026-05-19 13:00:01 게재

한국이 급격히 잘 살게 된 것은 천시·지리·인화의 조화 … ‘사회적 자본’ 확충은 여전한 과제

팥빙수를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빙수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예 자리를 잡는다. 의자에 앉아 대선배가 읽어보라고 빌려준 책을 펼친다. 책은 주영국대사와 주미국대사를 지낸 조윤제 서강대 교수가 근래에 낸 ‘한국 경제성장의 정치경제학: 성장과 교훈’이다. 이 책은 ‘한국이 세계사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어떻게 이루었는가’를 다루고 있다. 때마침 어느 외국인이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건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한국에 사나 봐요?” “아뇨,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어요.” 그의 이름은 새뮤얼로 영국에서 왔다. 런던에서 예술을 공부하며 사귄 친구들 덕에 매년 한국 중국 일본을 방문한다고 했다.

예술 전공자에게 한국은 어떠냐고 물었다. 뻔한 답변이 나올 걸 피하려 필자가 쌓은 세계인의 정체성도 흘렸다. 영국 이란 미국 거주 경험을 차례로 말했다. 마음을 녹였는지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다. 영국인 새뮤얼은 한국이 ‘동종의(homogeneous)’ 국가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 한국인은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꿈을 꾸고 있다.

시계를 먼 옛날로 돌려보자. 130년 전 영국인의 눈에 한국은 어떻게 비쳤을까. 1894년부터 1897년까지 한 영국 여성이 네 차례 한국을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다. 책 제목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로 저자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다. 비숍은 여행기 초반부에서 서울의 첫인상을 오물과 악취로 인해 “그 비천함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고 서술한다.

서울 거리에 오물이 넘쳐나고 악취가 진동하던 19세기 말 런던에는 전기열차 지하철이 다니고 있었다. 130년이 흐른 2026년 5월, 한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영국을 추월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윤제 교수의 책이 힌트를 준다. “경제발전이 단순히 경제정책이나 제도만의 결과가 아니며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 역사적 유산과 전통, 관습, 문화와 그 시대에 형성되는 나라의 기풍이 제도·정책과 어우러져 나타나는 종합적 결과”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운과 노력이 결합한 산물이다. 그는 이를 천·지·인으로 풀이하고 있다.

1890년 11월 4일, 영국 런던에서는 세계 최초로 전기열차 지하철이 개통했다. 몇 년 후 한국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서울의 첫인상을 오물과 악취로 묘사한다. 130년이 흐르고 한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이 영국을 추월했다. 영국 런던 지하철 ‘그린파크’ 역의 풍경. 사진 김욱진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승한 ‘천시’

맹자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세 가지를 들었다. 한국이 한두 세대 만에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세 가지 요인이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우선 천시를 보자. 천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새로운 국제 질서가 열어준 ‘결정적 타이밍’이다. 새롭게 출범한 국제통화 규범 ‘브레튼우즈 체제’와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으로 대변되는 자유무역 환경은 자원 빈국이었던 우리에게 제조업을 통한 성장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선진국들의 관세인하와 무역개방 기조는 세계 교역의 중심을 천연자원에서 공산품으로 바꿔놓았다. 만약 한국이 자원·시장을 독점하려 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기지개를 켰다면 풍부한 인적자원만으로 공산품을 만들어서 수출할 길은 요원했을 것이다.

20세기 중반 다수 경제학자는 인도나 브라질처럼 자원이 풍부하고 엘리트 관료가 많은 나라의 성장을 점쳤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추진력을 받은 국가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었다. 한국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대신 인력이 풍부했다. 우리는 공산품 제조와 수출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적합한 체형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하늘이 준 기회’는 분단·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한국이 세계경제라는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입장권으로 기능했다. 우리는 천시를 놓치지 않았고 제조 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미·중·일, 베트남까지 이어지는 ‘지리’

다음은 지리다. 대한민국의 지리는 단순히 물리적 위치를 넘어 지정학적 운명과 이웃 국가들과의 역동적 관계를 의미한다. 냉전시대 최전선에 자리했다는 사실은 안보 위협인 동시에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끌어내는 지렛대로 작용했다.

특히 인접한 제조업 강국 일본이 한국 경제에 ‘변압기’ 역할을 했다. 한국은 불행한 과거 속에서도 일본의 산업 제도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도입해 경공업 생산기지로서 입지를 빠르게 굳혀 나갔다.

또한 중국이 마오쩌둥 체제에서 ‘아직 움츠리고 있었다’는 점도 한국에게 커다란 지리적 이점이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늦게 시작한 덕에 한국은 제조업 시장에서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 중국이 문을 열었을 때는 20년 앞선 기술력으로 중국 시장의 수혜를 입는 ‘선발주자’ 지위를 확보했다.

여기에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확보한 외화와 건설 경험은 중화학공업 발전을 위한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이처럼 미국, 일본, 중국, 베트남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연결 고리는 한국이 중진국 함정을 뛰어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날개를 달아주었다.

주식회사 한국의 일사분란함 ‘인화’

마지막으로는 가장 중요한 인화다. 이 책에서는 인화를 교육을 통한 인적자원 양성, 국가리더십, 제도와 인센티브 시스템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신분 계급이 완전히 무너졌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평등한 기회의 장이 열렸다. 이는 과거시험을 통해 출세를 꿈꾸던 전통과 결합해 폭발적 교육열로 이어졌다. ‘코리언 드림’의 탄생이다. 1945년 80%에 달했던 문맹률은 의무교육 제도를 통해 급격히 낮아졌다. 이는 단시간에 숙련된 노동력을 대거 배출하며 산업화의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정부와 기업의 긴밀한 협업, 즉 ‘주식회사 한국(Korea Inc.)’의 작동 방식은 인화의 핵심이다. 한국의 국가지도자는 경제발전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유능한 관료 조직과 모험적 기업가들은 ‘사업보국’의 정신 아래 한배를 타고 뛰었다. 리스크가 큰 수출 산업과 중공업 분야에서 정부가 손실을 분담하고 기업이 과감하게 투자하는 구조는 세계가 놀란 압축 성장으로 이어졌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인화란 ‘성공을 향해 같은 꿈을 꾸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국민의 집단적 에너지’였다.

한국인이 내재하고 있던 인화를 130년 전 비숍이 미리 알아봤다. 비숍은 한국 여행기를 마무리하며 “이 나라 국민의 에너지는 잠재된 채 머물러 있다. 상류층은 가장 불합리한 사회적 의무에 마비되어 무위도식하며 일생을 보낸다. 중류층에게는 출세길이 열려 있지 않으며 에너지를 쏟을 만한 숙련된 직종도 없다. 하층민은 아주 타당한 이유로 굶주림을 면할 정도로만 일할 뿐 그 이상 힘을 쓰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자원은 여전히 한국의 바다와 토양 그리고 강인한 인구에 존재한다”고 애정 어린 조언도 남겼다.

이후 한국에서는 반세기 만에 지적조사 토지개혁 한국전쟁을 통해 신분계급이 붕괴했다. 우리는 ‘주식회사 한국’의 국민으로서 하나가 되어 내달렸고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

현재 주식회사 한국에 절실한 가치는

그런데 왜 헛헛할까. 주식회사 한국의 미래 과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번영을 이룬 만큼 많은 것을 잃었다. 공짜 점심은 없는 셈이다. 이 책에서는 사회적 자본의 낙후, 물질 만능주의의 부상, 신뢰자본의 결핍을 대표적으로 한국이 잃은 것으로 제시한다.

2023년 영국 레가툼 연구소가 발표한 국가별 번영지수도 이를 보여준다. 한국은 건강과 교육 부문에서 3위였고 경제적 질은 9위였다. 사회적 자본 부문에서는 167개국 중 107위를 차지했다. 사회적 자본은 제도에 대한 신뢰, 사회적 규범, 타인과의 관계, 사회적 연결망을 아우른다. 이 수치를 보면서 예술을 전공한 영국 여행자 새뮤얼의 “한국은 동종의 나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현재 주식회사 한국에 절실한 가치는 무엇일까. 어쩌면 ‘다름에 대한 포용’과 ‘경제에 대한 예술적 접근’ 아닐까.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각자의 답을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필자부터 살면서 딸, 아들에게 “그거 하면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이런 얘기는 결코 하지 않으려 다짐한다.

김욱진 ‘AI와 실리콘밸리의 반문화’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