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경제를 이끌어가는 반도체 산업
호황 보이는 아세안 반도체 수출 …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서 성장세
특히 AI의 발전, 휴머노이드, 전기차 확산, 데이터센터의 투자 증가에 따라 지난해 후반부터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같은 메모리 업체와 대만의 TSMC와 같은 파운드리 업체가 큰 수혜를 보고 있다. 수출증가로 이들의 이익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주가도 상승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 아세안 주요국 역시 세계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반도체 수출(IC 칩, 다이오드 등 장치, 제조장비)은 1747억달러로 우리나라의 1556억달러보다 더 많았다. 분야별로는 집적회로(IC) 칩(HS 8542)의 수출이 1354억달러였다. 올해 들어서도 칩 수출은 3월 113.0%, 4월 82.7% 증가해 폭증세다.
말레이시아 역시 1150억달러의 반도체 제품을 수출했고, IC 칩 만으로 1022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올해에도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수출은 싱가포르 정도는 아니지만 호조를 보이는데 반도체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기전자 부문의 수출이 4월까지 32.1% 늘었다.
반도체 산업은 중요한 무역수지 흑자부문이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IC 칩 흑자는 219억달러로 전체 무역수지 흑자 621억달러의 35.3%였고, 말레이시아의 칩 흑자는 348억달러로 전체 흑자 361억달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또한 필리핀의 칩 흑자는 122억달러였는데, 필리핀 전체 무역수지가 580억달러 적자라는 점에서 반도체 산업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실제로 필리핀의 반도체 수출 302억달러는 전체 수출의 35.7%로 아세안에서도 가장 높다.
토종 반도체 관련 기업도 성장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싱가포르는 1960년대 말, 말레이시아는 1970년대 다국적기업의 투자로 반도체 산업을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직후 경제난에 이어 주둔 중이던 영국 해군의 철수로 높은 실업률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1967년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르먼트의 투자를 유치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시작했다.
말레이시아도 1971년 페낭섬을 중심으로 다국적기업을 유치하여 반도체 기지를 건설했다.
즉 기본적으로 다국적기업이 반도체 산업을 키워 낸 것인데, 현재도 세계 상위 반도체 기업들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현지의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진출한 것이어서 주로 반도체 밸류체인 중 조립, 테스트, 패키징 등 후공정에 집중한다. 다국적기업은 웨이퍼를 수입하고 최종 칩을 수출하면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의 칩 수출 규모가 한국에 비해 큰 차이가 나지 않으나 무역수지 흑자 자체는 한국과 대만에 비해 낮다.
따라서 양국은 반도체 산업의 중심을 단순 후공정에서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밸류체인으로 고도화하고, 다국적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자국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고도화 측면에서 싱가포르는 웨이퍼, IC 디자인 등 전공정 분야나 장비제조 등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여전히 후공정에 경쟁력을 갖고 있는 말레이시아보다 한 단계 더 앞서 있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글로벌파운드리, 뱅가드 인터내셔널 세미컨덕터 등이 웨이퍼 설비를 갖추고 있어, 싱가포르는 세계 웨이퍼 생산의 1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동시에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ASML, ASM 인터내셔널 등이 소재 및 장비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싱가포르의 장비 부문(무역분류 HS 8464) 수출액은 2025년 276억달러로 말레이시아의 62억달러나 한국의 92억달러보다 많다.
자국 기업 육성이라는 점에서 양국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기술을 축적하면서 일부 기업은 증시에 상장될 정도로 성장했다. 싱가포르 증시에는 AEM 홀딩스, UMS Integration, 마이크로-미캐닉스(Micro-Mechanics), ASTI 홀딩스 등이 상장돼 있는데, 이들은 순수 웨이퍼 제조업체가 아닌 후공정 분야에서 장비, 솔루션 등을 공급하는 업체들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대표적인 후공정 기업인 말레이시아 퍼시픽 인더스트리스(Malaysian Pacific Industries·MPI), 이나리 아메트론(Inari Amertron)이나 유니셈(Unisem) 등 자국기업이 쿠알라룸푸르 증시에 상장돼 있다.
그렇지만 양국 상장기업의 매출규모는 다국적기업에 비해 아직 작고, 기업마다 차이는 있지만 최근 분기 실적이 하락한 기업도 있다. 아직 다국적기업을 제치고 전공정 분야에서 세계적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최근 베트남의 관심 증가
반도체 산업의 상대적 중요성이 높은 필리핀은 규모에서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 비해 경쟁력이 낮다. 필리핀은 제조장비 등을 육성하지 못했고, 후공정 IC 칩 생산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지난 3월 미국 반도체 업체인 암코 테크놀러지(Amkor Technology)의 필리핀 법인 대표로 필리핀 전자 및 반도체 산업협회회장인 비에라(Viera)씨는 필리핀 반도체 산업이 “쥬라기 시대”의 기술에만 의존하는 전통분야에 집중하고,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등에 필요한 반도체 부문에는 신규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좀비 산업”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투자 환경에 대해서 불확실성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베트남은 정부 주도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베트남은 아세안에서 최대 전자산업 생산기지로 많은 반도체를 수입한다. 2024년에만 해도 629억달러에 이르는 IC 칩을 수입함으로써 적자가 거의 500억달러에 이르렀다. 즉 세계의 성장 산업이 AI 관련 분야로 이전한다는 점, 전자산업에 필요한 칩을 수입한다는 점, 반도체 무역수지 적자 해소가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반도체 산업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2050년을 목표로 추진하는 반도체 국가전략에 의하면 베트남은 2030년 말까지 약 10개의 패키징, 조립 및 테스트 공장을 유치해 약 5만명의 칩 엔지니어 및 전문 인력을 육성할 계획이다. 나아가 2050년까지는 최소 3개의 반도체 공장, 20개의 패키징, 조립 및 테스트 공장 등을 갖춰 연간 약 1000억달러의 매출을 창출하는 자립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할 예정이다.
베트남 반도체 산업은 2010년 인텔이 호치민에서 시작한 칩 패키징과 테스팅에서 출발했다. 이 사업장은 현재 인텔의 해외 사업장 중 최대 규모가 되었고 지난해 117억달러의 칩을 수출했다. 인텔은 또한 지난해 코스타리카에 있던 생산시설을 호치민으로 재배치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2026년에는 수출을 146억달러로 늘릴 것으로 알려졌다.
암코 역시 2023년 먼저 5억3000만달러를 들여 박닌성에서 공장을 가동했고, 이어 2024년 10억7000만달러의 투자를 승인받아 총 16억달러를 투자해 지난해부터 생산을 늘리고 있다. 암코는 당초 필리핀에 추가 투자를 고려했으나 베트남을 최종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우리는 베트남에 222억달러, 말레이시아에 48억달러, 싱가포르에 52억달러, 그리고 필리핀에 27억달러의 반도체 칩(HS8542)을 수출했다. 올해도 4월 말 현재 80~100% 정도의 수출증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반도체 산업은 아세안과 공급 체인으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앞으로도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아세안 반도체 산업의 발전과정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고, 싱가포르의 사례를 보듯이 우리도 장비 제조 분야 등으로 더 다각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